"라떼는 말야~" 제 2탄 - 깜부기와 개구리 뒷다리

 


감나무 아래서 세월을 보다

8년 만에 고향을 찾았던 것은 1994년의 일이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친구들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보고 싶어 고향을 찾았던 때로부터 어느덧 8년이 흘러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뉴욕에서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되어 있었고,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상대회 취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난 뒤 며칠의 여유가 생겼다.

문득 고향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막상 찾아가 보니 세월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울타리 너머의 수시(水柿)감

아는 사람들이 그 8년 사이 모두 떠나고, 대전이나 인천 등지에서 온 타지인들이 전부인 동네를 걷다가 내가 살던 집 바로 뒤편의 울타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집에는 수시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퍼져 있었고, 일부는 울타리 너머까지 늘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나무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주인 할머니 눈을 피해 가지를 잡아당겨 아직 익지도 않은 땡감을 훑어 따서 달아나기도 했고, 바람이 불고 난 다음 날이면 떨어진 감이 없나 울타리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어느 날은 긴 장대를 끌고 가다가 가지를 툭 쳐서 감을 떨어뜨리고 냅다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감나무는 자연이 아니라 먹거리였다.


그런데 8년 만에 다시 본 감나무는 놀라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빨간 수시감이 나뭇가지를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이상했다.

동네에 초등학생 또래 아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감들이 하나도 안 따이고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이, 그거 떫은데요"

나는 가장 잘 익은 수시 하나를 따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동네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거 먹을 사람?"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한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그거 떫은데요."

"며칠 두면 말랑해지고 달아지는데?"

"집에 과자 많아요."

"가져가서 먹어."

"괜찮아요."

신기하게도 갖겠다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더 놀라서 물었다.

"그럼 너희는 과자 말고 다른 건 안 먹니?"

"안 먹어요."

"메뚜기 먹어본 사람?"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곤충을 왜 먹어요?"

"번데기는?"

통조림에 든 번데기를 먹어봤다는 아이가 겨우 한 명 있었다. 

"그럼 깜부기가 뭔지 아는 사람!"

서로를 쳐다보며 두꺼비처럼 눈만 껌벅거리는 아이들.

마지막으로 물었다.

"개구리 뒷다리는?"

그 순간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마치 식인종을 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감나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감나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변한 것도 아니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살던 세상은 늘 배가 고팠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찔레열매를 따먹고,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잡고, 개울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들판의 풀과 열매를 입에 넣어 보며 자랐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거리였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감나무는 먹거리가 아니라 풍경이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그만큼 가난에서 멀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오디를 따먹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봄이면 일부러 찻길에서 멀리 떨어진 공원을 찾아 오디를 따먹고, 아카시아꽃을 입에 넣어 보기도 한다.

혹시 삐비나 싱아가 없을까 싶어 들길을 두리번거리며 걷기도 한다.

여름이면 산길을 걸으며 산딸기를 따먹고, 가을이면 벼과(科)식물군의 이삭이 여물었는지 따서 깨물어 본다.

물론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일종의 놀이에 가깝다.


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가끔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고생을 몰라."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자신이 없다.

그 시절이 다시 찾아온다면 나는 허리띠를 졸라매기 전에 먼저 좌절할지도 모른다.

배고픔을 견디며 살아냈던 어린 날의 나는 이제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가난은 추억이 될 때 아름답지, 현실이 되면 결코 낭만이 아니다.


풍요의 그림자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에 오늘의 풍요를 당연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뉴욕 거리에서 커다란 검은 비닐봉투를 끌고 다니며 플라스틱 병을 줍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하루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고, 빈 병 하나를 더 찾기 위해 몇 시간씩 거리를 걷는 사람들.

그들의 등을 보고 있으면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돈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커피 한 잔.

음식 한 접시.

비닐봉투 하나.

사소한 소비에도 문득 죄책감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랄까, 내 책상 서랍 속엔 볼펜을 비롯해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써도 넉넉할 만큼, 아직 쓸만 한 펜들이 수 십개가 있다. 골동품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닌, 그저 아직 쓸만 한 것들이다.

물론 내가 샀을 리 만무하다.  그냥 주변에 임자없이 굴러다니는 것들이 아까워서 줏어다 놓은 것들이다.

소위 낙수효과 덕분이든 아니든 덩달아 남들 처럼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내 안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8년 만에 찾았던 고향의 감나무는 나에게 감을 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보여주었다.

울타리 너머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빨간 수시감은 말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면,

우리가 변화를 겪어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시대의 사람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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