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야~ " 제1탄 - 성남시와 단대동 유래

 “나 때는 말야~”

“나 때는 말야~”로 말을 시작했다가는 금세 ‘꼰대’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되었다.

대개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이가 많은 쪽이 젊은 세대의 행동이 못마땅할 때 꺼내는 말이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십중팔구 잔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요즘은 오히려 “나 때는 말야~”라는 말을 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아졌다.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당연했던 일들이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고, 그때의 상식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래서 오늘은 기꺼이 ‘꼰대’ 소리를 감수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살아온 시절의 풍경을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에게는 따분한 옛날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이 될지도 모른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이야기일 것이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잊고 지냈던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꺼내어 보려 한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이야기다.

그 시절 우리 네 명은 명동성당 앞 YWCA 지하 음악다방을 아지트 삼아 살다시피 했다.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모였다. 음악을 신청해 듣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미래에 대한 허황된 꿈을 늘어놓으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학생이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용돈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 커피값을 달라고 손을 벌릴 형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에 몇 잔씩 커피를 마시며 음악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비결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당시 정부는 청계천 복개공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청계천 주변에는 6·25 전쟁 이후 삶의 터전을 잃고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판잣집과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대규모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생활하수가 그대로 흘러들어 악취가 진동했고, 전염병이 돌기도 했다.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청계천은 산업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정부는 청계천을 복개하고 그 위에 도로와 고가도로를 건설하는 한편,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군 일대, 지금의 성남 단대동 부근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그 과정에서 철거민들에게는 입주권이 주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딱지"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말하면 분양권 비슷한 것이지만, 그때는 단대동 일대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약 20평 남짓의 땅에 대한 권리였다.

그리고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훗날 "복부인"이라 불리게 되는 부동산 투자자들이었다.

그들은 철거민들에게서 입주권을 사들이기 위해 단대동 일대를 드나들었고, 개발 예정지와 구획을 표시한 지도를 구하려고 했다.

바로 그 지도가 우리의 돈벌이 수단이었다.


우리는 복덕방에서 지도를 한 장에 50원씩 떼어 왔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에게 100원씩 받고 팔았다.

50원 남는 장사.

지금 기준으로는 우스운 돈 같지만 당시에는 커피값은 물론이고 짜장면까지 사 먹을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넷이 교대로 버스에 올라 지도를 팔고, 나머지는 음악다방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청춘을 보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요즘 아이들에게 버스에 올라가 지도를 팔아 보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할 수 있을까?

물론 시대가 다르다.

지금은 버스 안에서 물건을 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도 장사 자체가 아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부끄럽다고 주저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돈이 필요하면 방법을 찾았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대였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온 것 같다.

"내 자식만큼은 나처럼 고생시키지 않겠다."

그 마음 하나로 허리띠를 졸라맸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고, 없는 형편에도 자식 공부를 시켰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놀라운 발전을 이뤄냈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한 가지 아쉬움도 생긴다.


우리는 가난은 물려주지 않았지만, 가난을 이겨냈던 힘까지 함께 물려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배고픔을 견디던 인내심,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끈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도 길을 찾아내던 융통성 말이다.

물론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고생을 물려주고 싶겠는가.

나 역시 내 자식만큼은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온다. 인생이란 것이 늘 순풍에 돛 단 배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어려움을 이겨내는 지혜와 강인함만큼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라도 가르쳐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태평성대만 계속될 리는 없다.

어느 시대에나 위기는 찾아온다.

그때 우리 아이들과 손주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 위기를 맞이하게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 50원을 남기기 위해 버스 안을 누비며 지도를 팔던 열여덟 살 소년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그 시절의 고생이 꼭 불행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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