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옛날 옛적 깊은 산중에 산신령이 살았다.
산신령은 수백 년을 숲을 지켜왔지만 근래 들어 골치가 아팠다. 숲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여우는 꾀만 많고, 곰은 우직하나 미련하고, 멧돼지는 힘만 믿고 날뛰어 숲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짐승들은 날마다 싸우고, 약한 것들은 짓밟히고, 숲 전체가 썩은 냄새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신령의 눈에 한 마리 호랑이가 들어왔다.
여느 호랑이가 아니었다. 발 하나를 내딛어도 땅이 울리고, 눈빛 하나에 뭇짐승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함부로 날뛰지 않았다. 약한 짐승 앞에서는 발톱을 감추었고, 억울한 짐승의 하소연엔 귀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 영특했다. 숲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눈이 여느 짐승과는 달랐다.
산신령은 무릎을 쳤다.
"저 놈이로구나."
산신령은 그날 밤 호랑이의 꿈에 나타나 점지를 내렸다. 호랑이는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숲의 왕이 되어 있었다. 짐승들은 환호했다. 오랜 어둠 끝에 드디어 제대로 된 왕이 났다고.
산신령도 흐뭇했다.
"이제 이 숲은 괜찮겠구나."
그리하여 산신령은 슬며시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될 것 같았다.
二
처음 한동안은 더할 나위 없었다.
호랑이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숲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무리 작은 짐승의 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묵은 적폐들을 하나씩 걷어내는 솜씨는 숲 전체를 탄복하게 만들었다. 짐승들이 수군댔다.
"저런 왕은 처음이야."
"타고난 거야, 타고난 거."
산신령도 등 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래라 저래라 할 것도 없었다. 호랑이는 알아서 척척 해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호랑이가 슬슬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조금씩이었다.
숲의 회의를 주재할 때였다. 호랑이는 여우에게 사회를 맡겼다. 그런데 여우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호랑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짐승들은 어리둥절했다. 사회를 맡겼으면 끝까지 지켜보면 될 것을, 왜 중간에 빼앗는 것인지. 여우는 멋쩍게 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짐승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우가 저리 모자랐나? 왕이 저런 여우를 곁에 두다니, 쯧쯧쯧......'
호랑이는 몰랐다. 자신이 여우를 도운 게 아니라 망신을 준 거라는 걸.
또 어떤 날은 각 구역 짐승들이 현안을 보고하는 자리에서였다. 호랑이는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막아세웠다.
"그것도 몰라? 그건 이렇게 해야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짐승들 앞에서 면박을 당한 담당 짐승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구경하던 짐승들은 수군댔다.
"왕이 저런 것들을 기용했다는 거잖아......"
산신령은 등 위에서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三
문제는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호랑이는 날이 갈수록 자신의 영특함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기려 하지 않았다. 숲의 회의가 있을 때마다, 짐승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호랑이는 으레 자신의 날카로운 판단을 펼쳐 보였다.
"봤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야 한다는 거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호랑이는 거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문제는 — 짐승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도 호랑이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처음엔 탄복했다. 두 번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이 되자 짐승들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또 저 얘기야......"
"알았어, 알았다고."
가만 있어도 저절로 빛났을 호랑이가 스스로 횃불을 들고 다니며 "나 빛나지 않냐?"고 외치고 있었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짐승들의 눈이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지방 선거철이 돌아왔다. 각 구역마다 새 우두머리를 뽑는 때였다. 짐승들은 기대했다. 이번 기회에 숲의 세력이 더 넓어지리라고.
변방엔 호랑이왕이 등극하기 전 패악질을 일삼던 멧돼지가 스스로 파헤친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중이었다. 그 구덩이를 에워싼 몇 안되는 멧돼지 패거리들이 어서 기어 나오라고 '멧돼지 어게인'을 외치고 있었다.
대부분 숲의 짐승들은 이번 선거가, 그동안 동으로 서로 그러다가 갑자기 남에서 북으로 미친듯이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던 멧돼지가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호랑이왕이 등극하는 것을 보고 바짝 움츠리고 있던 변방의 짐승들도 품어 안아 더 큰 숲을 만들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랑이의 생각은 달랐다.
호랑이는 이번 선거를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는 짐승들을 각 구역에 심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변방을 끌어안기보다 자기 사람을 심는 것이 먼저였다. 숲을 넓히는 증축이 아니라 — 기존 숲마저 허물고 자기 입맛대로 다시 짓는 재개발이었다.
짐승들은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원한 건 저게 아닌데......"
결과는 참담했다. 이미 이겼다고 여겼던 구역들마저 줄줄이 빼앗겼다. 집토끼를 단단히 챙기지 않은 채 산토끼를 몰러 나갔다가 둘 다 놓친 격이었다.
호랑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산신령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슬슬 등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 하지만 내려가는 순간, 저 발톱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걸 산신령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지......"
산신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四
산신령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호랑아."
호랑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오랜만에 듣는 산신령의 목소리였다.
"내 말 들리느냐?"
"들립니다, 산신령님."
호랑이의 목소리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산신령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일깨워야 한다는 것을.
"내가 너를 점지하던 날을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그날 내가 왜 너를 골랐는지 아느냐?"
호랑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제가 출중했기 때문이겠지요."
산신령은 쓴웃음을 삼켰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출중한 짐승이야 숲에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너를 고른 건 — 그 출중함을 네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톱이 있어도 함부로 긁지 않았고, 눈빛이 날카로워도 함부로 쏘지 않았지. 짐승들이 너를 따른 건 네가 강해서가 아니라 — 네가 강함을 감출 줄 알았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너는 어떠냐."
산신령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숲의 회의 때마다 네 영특함을 펼쳐 보이느라 바쁘고, 여우에게 사회를 맡겼다가 도로 빼앗고, 짐승들 앞에서 네 부하들을 면박 주기를 밥 먹듯 하는구나. 호랑아 — 네가 부하를 망신 줄 때마다 짐승들은 너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고개를 갸웃거린다는 걸 아느냐? 왜 저런 모자란 것들을 곁에 두었냐고."
호랑이의 귀가 뒤로 살짝 눕혀졌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가만 있어도 뚫고 나오는 법이다. 근데 너는 — 송곳 스스로가 자루를 흔들고 있구나. 호랑아, 네가 그러지 않아도 짐승들은 다 안다. 네가 얼마나 뛰어난지. 굳이 매일 보여주지 않아도."
숲이 조용해졌다. 바람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산신령은 계속했다.
"그리고 이번 선거. 너는 숲을 넓힐 기회를 — 너를 넓히는 기회로 썼다. 짐승들은 증축을 원했는데 너는 재개발을 하려 했지. 그렇게 새로 재개발한 구역에서 새로운 심복들을 더러 얻었다 치자. 그 심복들을 네 주위에 둘러세우면 널 따르던 뭇 짐승들은 두려움이 생겨 슬금슬금 널 떠난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게냐? 토끼장이 아직 어수선한 판국에 산토끼를 몰러 나갔다가 그 틈새에 집토끼들이 뛰쳐나가면 산토끼 몇 마리 얻은들 어디다 써먹을 테냐?"
호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랑아."
산신령의 목소리가 이번엔 한결 부드러워졌다. 꾸짖음이 아니라 —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나는 네가 미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너를 점지한 것을 후회해서도 아니고. 지금도 이 숲에 너만한 짐승이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이러는 거다."
호랑이 고개가 어느 순간 푹 꺾였다.
"뛰어난 자가 교만해지는 순간 — 그건 적이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는 거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이지. 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이야. 네 탁월함이 지나쳐서 독이 되는 걸 나는 지금 네 등 위에서 보고 있다."
호랑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숲도 말이 없었다.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산신령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호랑아. 제발 — 예전의 그 호랑이로 돌아가거라. 발톱을 감출 줄 알고, 빛을 감출 줄 알고, 짐승들이 스스로 네 곁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던 — 그 호랑이로."
호랑이는 자못 울상이 되어 눈만 꿈벅이고 있었다.
"자고로 네가 앉은 그 자리는 스스로 탐한다고 얻어지는 자리가 아니느니라. 나랏님은 하늘이 낸다는 말을 못들었더란 말이냐? 네 바로 전에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멧돼지가 뚝심 하나 믿고 그 자리를 강탈했다가 지금 치도곤을 맞는 걸 보고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냐? 이 고연지고!"
한참 후.
호랑이가 낮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이 숲 전체를 흔들었다.
산신령은 아직 등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내려올 수 있을지 —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했다.
옳은 말은 외로운 법이니까.
— 孤韻 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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