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손을 놓은 은퇴자들의 연금이 깎인다는데.......

 


연금의 두 얼굴 — 고갈, 그리고 우리가 묻지 않은 질문


며칠 전 미국 사회보장국(SSA) 신탁이사회가 발표를 하나 내놨다. 

사회보장연금 기금이 2032년이면 바닥난다는 것. 

그때부터는 걷히는 세금만큼만 지급하게 되니, 평균 수령자는 월 500달러 가까이를 그냥 잃는다. 

은퇴자 평균 수령액이 2,071달러인 걸 감안하면, 

 삭감이 아니라 생계의 한 축이 무너지는 얘기다.


같은 시기, 한국은 정반대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2025년 3월, 18년 만에 여야가 합의해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9%에서 13%까지 단계적으로 올렸다. 

여기에 코스피가 4,200에서 9,000까지 치솟은 증시 호황까지 겹쳐, 

기금 고갈 시점은 2057년에서 2065년으로 8년이나 늦춰졌다.


한쪽은 벌어서 메웠고, 한쪽은 깎아주다가 구멍이 났다. 

이 대비가 흥미로운 건, 단순히 "누가 정치를 잘했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왜 미국은 거꾸로 갔나


미국의 위기는 개혁의 실패가 아니라 개혁의 부재, 그리고 방향이 아예 반대인 감세 정책 때문에 왔다. 

2025년 통과된 감세법이 사회보장 수급자에 대한 세금을 낮추면서, 정작 신탁기금으로 들어와야 할 재원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문제를 풀 골든타임에 오히려 곳간 문을 더 열어둔 셈이다.


그나마 논의되는 해법 중 가장 유력한 카드가 사회보장세 상한선(2026년 기준 184,500달러) 폐지다. 

지금 미국 노동자의 94%는 소득 전액에 세금을 내는데, 

최상위 소득자는 연초 두 달치 소득만으로 납부를 끝내버린다. 

연봉이 오를수록 실효세율은 오히려 떨어지는 구조다. 

이 상한을 없애면 75년 재정 부족분의 절반가량을 메울 수 있다는 추산도 있어, 

초당적 상원의원들까지 나서 이 안을 밀고 있다.


*** 한국의 반도체 논쟁과 겹치는 지점


흥미로운 건, 이 논쟁의 밑바닥에 깔린 질문이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반도체 초과이익 논쟁과 정확히 포개진다는 사실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천문학적 영업이익을 두고, 

정부 고위인사들은 "이건 개별 기업만의 성취가 아니라 사회적 성과"라 말했다. 

국가가 교육을 시키고, 전기·도로·용수 인프라를 깔아주고, 세제 혜택까지 줬으니 그 이익의 일부는 사회에 대한 반대급부라는 논리다. 정책실장이 꺼낸 '국민배당금' 구상도 같은 맥락이다.


이 논리를 개인의 임금으로 끌어내리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고액연봉은 정말 온전히 그 사람의 생산성만으로 만들어진 걸까. 

저임금·교대제 노동, 남들이 꺼리는 일을 떠맡은 사람들의 몫이 거기 스며들어 있는 건 아닐까. 

경제학의 오래된 원칙, "힘들고 꺼려지는 일일수록 임금이 높아야 한다"는 보상적 임금격차 이론은 현실에서 정반대로 작동한다. 

돌봄노동, 육체노동이 오히려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다. 

이건 이론의 오류가 아니라,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협상력이 애초에 구조적으로 짓눌려 있다는 증거다.


*** 결국 같은 질문 — 무엇을 "정당한 몫"이라 부를 것인가


미국의 사회보장세 상한 폐지 논쟁과 한국의 반도체 초과이익 환수 논쟁은, 표면은 달라도 같은 철학적 축 위에 서 있다. 

"생산의 성과를 개인·기업 단위로 온전히 귀속시킬 것이냐, 사회적 기반에 대한 반대급부로 재정의할 것이냐."


사회보장연금을 "낸 만큼 받는 보험"으로만 보는 한, 상한선 폐지는 제도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애초에 저소득자는 낸 것보다 비례적으로 더 받고 고소득자는 덜 받도록 설계된 지금의 급여 산정 공식 자체가, 이미 순수 보험이 아니라 재분배 장치라는 걸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 혼합형 제도를 운영하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반도체 논쟁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사회적 성과"라는 말은 쓰면서, 정작 그 몫을 어떻게 사회에 되돌릴지는 침묵한다. 

노조에 양보를 요구할 명분으로만 그 말을 쓰고, 정작 그 산업을 떠받친 하청노동자·교대제 노동자에 대한 실질적 환수는 말하지 않는다. 

말은 재분배를 향하는데, 실천은 여전히 개별 성취 프레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세율 몇 퍼센트를 더 걷을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소득은 누구의 몫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다시 던지는 일이다. 

한국이 여야 합의로 보험료율을 올릴 수 있었던 건 결국 이 질문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고, 미국이 갈 길을 잃은 건 그 합의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고갈 시점은 숫자에 불과하다. 

진짜 고갈되고 있는 건, "정당한 몫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아젠다는, 그 합의를 다시 세우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