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감옥에 있는 동안, 한동훈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한때는 당대표 자리까지 올랐었다. 이 한 문장이 지난 몇 년간 이 나라 사법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의 전부다.
1. 같은 죄, 다른 저울
조국 전 법무장관의 혐의는 결국 ‘시간을 부풀렸다’는 수준이었다. 자녀가 실제로 했던 활동의 이력을 과장하고 다듬은 것 — 능력 있는 학부형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그 흔한 스펙 쌓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검찰 특수부는 가족 전원을 소환하고 압수수색을 벌였고,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유죄를 확정했다. 그는 그렇게 법의 이름으로 갈기갈기 찢겼다.
반면 한동훈 전 장관의 딸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단독 저자 논문 6편을 발표하고 전자책 10권을 출판했다. 반독점법, 국가채무, 세포주기 — 대학원생도 버거워할 주제들이다. 논란이 일자 그 논문 대부분은 학술저널 홈페이지에서 통째로 삭제됐다. 학계에서 발행된 논문이 삭제되는 건 표절이나 저자 자격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나 벌어지는 이례적인 사건이다. 케냐 언론은 아예 “한국 장관 딸을 위해 케냐의 학술 작가가 논문을 대신 썼다”고 보도했다.
이쯤 되면 누구의 혐의가 더 무거운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다.
2. 수사는 있었다, 책임은 없었다
혹자는 “한동훈은 기소조차 안 됐으니 죄가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 기소가 안 된 게 아니라, 수사가 경찰 단계에서 조용히 매장됐다.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는 고발이 접수된 지 1년 8개월 만에 모든 혐의에 대해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검찰의 기소 재량권을 논하기 이전에, 애초에 검찰 앞까지 사건이 가지도 못한 것이다.
1년 8개월. 진실을 규명하기엔 짧지 않은 시간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덮기엔 지나치게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조사했고 왜 결론이 그렇게 났는지, 국민은 알 길이 없다. 조국의 자녀 입시 의혹은 검찰이 세상에 다 까발려 국민 앞에 전시했다. 한동훈의 딸 의혹은 경찰이 서랍 속에 조용히 집어넣었다. 이 비대칭이야말로 이 나라 사법 정의의 민낯이다.
3. 대법관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 나라
이 지독한 이중성은 조국-한동훈 비교에서 끝나지 않는다. 최근 윤석열-김건희 부부 재판은 이 나라 사법제도의 자화상을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완성해 주었다.
같은 여론조사 조작 사건, 같은 부부, 그런데 재판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결론이 정반대로 갈렸다. 서울중앙지법은 명태균씨로부터 조작된 여론조사를 무상으로 받은 혐의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며 부부의 ‘암묵적 공모’를 인정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된 김건희씨는 다른 재판부에서 무죄를 받았다. 공모를 인정한 재판부와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가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 사법부의 현주소다.
참여연대가 정확히 짚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다른 공범들은 모두 유죄가 확정됐는데 김건희씨만 비껴간 판결은 “법 앞의 평등을 조롱한 것”이다. ‘계약서가 없다’는 이유로 정치공작 혐의를 무죄로 본 논리에 이르러서는 실소를 넘어 분노가 치민다. 밀실에서 여론조사 조작을 청탁하면서 계약서를 쓰는 정치공작범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4. 법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판결에 불복하지 않는 것과 판결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법치주의가 요구하는 건 전자이지 후자가 아니다. 같은 부부가 같은 사건으로 한 사람은 징역, 한 사람은 무죄를 받는 나라에서, 조국은 갈기갈기 찢기고 한동훈은 1년 8개월 만에 조용히 덮이는 나라에서, “법원 판결이니 무조건 승복하라”는 요구는 정의의 이름을 빌린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지 않는 사법 시스템을 “법치”라 부르며 떠받드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대들이 지키려는 것은 법인가, 아니면 그 법을 쥔 자의 편리함인가.
정의는 원래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두 개의 정의가 있다. 힘 있는 자를 위한 정의와, 힘없는 자에게 적용되는 정의. 그 사이의 간극을 ‘속(俗) 정의’라 부르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5. 같은 법원, 다른 나라 — 이진관과 지귀연
이 간극은 판사 개인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판사란 본디 육법전서를 법대 위에 펼쳐놓고 조문에 따라 재단하는 것이 본업이다. 그런데 같은 서울중앙지법 안에서 이진관 부장판사와 지귀연 부장판사는 마치 서로 다른 헌법책을 펼쳐놓은 것처럼 다른 결론을 내렸다.
이진관 부장판사는 한덕수에게 특검 구형보다 8년 많은 징역 23년을, 박성재 전 법무장관에게도 구형보다 5년 많은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12·3 내란의 준비 시점을 2023년으로 판단했고, 2심에서 뒤집혔던 명태균 여론조사 사건도 유죄로 되돌렸다. 반면 지귀연 부장판사가 이끈 재판부는 핵심 증거였던 노상원 수첩의 증거능력을 배제해 내란 준비 시점을 내란 이틀 전인 12월 1일로 축소시켰고, 비상계엄을 12·12나 5·18처럼 ‘통치행위’로 해석하는 이례적 판단을 거듭했다. 같은 법원, 같은 사건 계열을 놓고 두 재판부가 산정한 ‘내란 준비 시점’의 격차가 1년을 넘는다. 이것이 상식이 통하는 사법부인가, 아니면 재판부 뽑기가 형량을 좌우하는 도박장인가.
6. 제재는 없다 — 삼례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판사와 검사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길은 있는가. 냉정히 말해 지금은 거의 없다. 판결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탄핵할 수 없고, 법관징계위원회도 판결 내용 자체는 다루지 않는다. 유일한 정상적 견제는 상급심 판단뿐이다.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사건이 그 증거다. 정신지체를 가진 청년 세 명이 강압수사로 허위자백을 하고 3~6년씩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2016년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수사검사도 담당판사도 형사처벌은커녕 징계 한 번 받지 않았다. 유일한 결과는 피해자들이 직접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나온 15억여원의 국가배상, 그리고 17년 만에야 나온 검사 단 한 명의 개인적 사과가 전부였다. 판사는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국가배상법에는 공무원에게 고의·중과실이 있을 때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항이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이 조항이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것이다. 조직이 제 식구를 감싸는 온정주의 앞에서 구상권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무죄로 판명 나도 수사검사와 판사의 지갑에서는 단 한 푼도 나가지 않는 나라 — 이것이 오판을 막을 유인을 스스로 지워버린 사법 시스템의 실체다.
법관 직선제나 징벌적 구상금 같은 파격적 처방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지점, 즉 제도가 없는 게 아니라 있는 제도조차 작동시키지 않는 무책임의 사슬 때문이다. 최소한 고의·중과실이 인정된 오판에 대해서는 구상권 행사를 의무화하고, 그 청구 주체를 피해자 본인에게도 열어주는 것 — 이것이야말로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 할 최소한의 방지책이다.
孤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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