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야~ " 제 3탄 - 땅떼기 한 평에 밀가루 한 포대

 


보릿고개

보릿고개라는 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제 옛말 사전에나 남아있는 낱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고개를 실제로 넘어본 사람에게 보릿고개는 단순히 문학적 서사를 꾸미는 낱말이 아니다. 배고픔에도 계절이 있었다는 기억이다. 지금도 늦봄의 길어진 해와 아직 푸른 보리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까닭없이 명치 끝 어딘가가 서늘해진다.

내 나이 열 살 무렵이었다.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았고, 지난 가을 거둬 저장해두었던 고구마마저 바닥난 지 오래였다. 쌀독 이야기는 아예 꺼낼 형편도 아니었다.

저녁 때가 되면 나는 낫을 들고 남의 보리밭으로 숨어들곤 했다. 아직 이삭도 패기 한참 전인, 한 뼘 남짓 자란 어린 보리싹을 조금씩 베어왔다. 들키면 혼이 날 일이었으니 밭둑 아래 몸을 낮추고 주위를 살피며 낫질을 했다.

그 보리싹을 어머니가 된장 푼 물에 넣고 끓였다.

기름 한 방울 없는 국이었다. 풋내와 흙내가 뒤섞인 멀건 국물에 보리싹 한 웅큼이 둥둥 떠다녔다. 그것이 밥상을 대신하던 날도 있었다. 그게 그해 봄, 우리 식구의 저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밀가루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돌았다.

그렇다고 거저 주는 밀가루는 아니었다. 일을 해야 했다.

당시 어른들은 그 일을 ‘땅떼기’라고 불렀다.

신작로 가장자리 일부를 남겨놓고 가운데를 사방 여섯 자쯤, 깊이 한 자가량 파내는 일이었다. 사방 여섯 자면 대략 한 평이다. 그렇게 한 평을 파내면 밀가루 한 포대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에게까지 일을 시켰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그 시절에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노동을 지금처럼 또렷하게 나누지도 못했다. 집안에 손 하나가 아쉬우면 아이도 어른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나는 책보를 집에 던져놓다시피 하고 신작로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먼저 나와 계셨다.

괭이로 굳은 땅을 찍어 깨뜨리고 삽으로 흙을 퍼냈다. 나는 아버지가 파낸 흙을 망태기에 담아 날랐다. 지게를 질 만큼 크지도 못했으니 내 몫은 망태기였다.

한 망태기.

또 한 망태기.

어깨가 아프면 손으로 들었고, 손이 아프면 다시 어깨에 걸쳤다. 뙤약볕 아래서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땀이 흙먼지와 엉겨 얼굴에 검은 줄을 만들었고, 어린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혔다. 물집이 터진 자리에는 흙이 들어가 따끔거렸다.

그래도 아프다고 집에 갈 수는 없었다.

한 평을 파야 밀가루 한 포대가 생겼으니까.

아버지도 말없이 땅을 팠고 나도 말없이 흙을 날랐다.

아마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그렇게 흙을 나르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아버지들에게는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여유조차 없었다. 자식을 굶기지 않는 것이 미안하다는 말보다 먼저였던 시절이었다.

마을에 할당된 구간을 다 파내고 나면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파낸 자리에 자갈을 퍼다 메웠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라 흙을 파냈다가 다시 죽어라 자갈을 날라 그 자리를 메웠다. 파내는 데 한 평, 메우는 데 또 한 평. 그것도 일한 만큼 밀가루로 돌아왔다.

그 일은 여름방학 내내 이어졌다.

어린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필요도 없었다.

흙을 왜 파는지, 왜 다시 메우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몇 평을 했느냐였다. 몇 평을 했느냐에 따라 우리 집에 들어오는 밀가루 포대 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묘한 노동이었다.

도로를 정비하기 위해 꼭 그렇게 해야 했던 것인지, 아니면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서도 그냥 주지는 않기 위해 마련된 일이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비만 오면 버스가 지나간 자리엔 물웅덩이가 깊이 패였었다는 기억.

그게 우리에게 먹고살 수 있는 일이 되었다는 것!

아버지가 괭이로 찍어낸 한 삽의 흙과 내가 망태기로 나른 한 짐의 흙이 쌓이고 쌓여 밀가루 한 포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포대가 우리 집 부엌으로 들어오던 날이면 당분간은 굶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집 안에 들어찼다.

어머니는 그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였다.

거의 매일 저녁이었다.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하고 손으로 뚝뚝 떼어 멀건 장국에 던져 넣었다. 끓는 솥 안에서 하얀 밀가루 조각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변변한 것도 없었다.

그래도 배가 고팠으니 먹었다.

오늘도 수제비.

내일도 수제비.

그 다음 날도 수제비.

처음에는 밀가루 음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날마다 먹으니 나중에는 그 하얗고 물컹한 덩어리만 보아도 싫증이 났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수제비를 지독하게 싫어한다.

수십 년이 지나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면서 옛 추억이랍시고 꽁보리밥과 수제비를 찾는 사람들이 괜시리 밉다. 

그런데 같은 밀가루로도 전혀 다른 저녁이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귀한 밀가루를 따로 챙겨 국수집에 맡기셨다.

밀가루가 국수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면 그 국수를 뒷방에 잘 재워두었다. 지금처럼 포장된 국수를 돈 주고 사 먹던 때가 아니었다. 우리 집의 밀가루가 가느다란 국수가락으로 모습을 바꾸어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면 나에게 또 하나의 일이 생겼다.

조개를 캐러 갯벌로 가는 일이었다.

우리 집에서 갯벌까지는 시오리쯤 되었다. 어린아이 걸음으로는 꽤 먼 길이었다. 빈 바구니를 들고 갈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조개를 가득 담아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무거웠다.

그래도 그 길은 흙을 나르던 신작로와는 달랐다.

갯벌에는 바람이 있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검은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차고 미끈한 펄이 비집고 올라왔다.

그 시절 부안 갯벌에는 생합이라 부르던 대합이 지천이었다.

갯벌에 들어서 발을 몇 번 구르면 펄 속에 숨어 있던 생합 하나가 쏘옥 얼굴을 내밀었다. 허리를 굽혀 집어 바구니에 넣고, 다시 몇 걸음 옮겨 발을 굴렀다.

하나.

또 하나.

빈 바구니 바닥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차츰 묵직해졌다. 조개가 하나둘 늘어갈수록 어린 마음도 덩달아 든든해졌다. 오늘 저녁에는 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캐온 조개를 어머니가 삶으면 파르스름한 바닷빛 국물이 우러났다.

그 국물에 아버지가 국수공장에 밀가루를 맡겨 뽑아온 국수를 삶아 말았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나는 조개 국물, 그 속에 가지런히 잠긴 국수가락.

수제비와 똑같은 밀가루였는데 맛은 전혀 달랐다.

후루룩 국수를 빨아들이면 조개 국물의 감칠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어린 나는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그 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수제비는 지독하게 싫어하지만, 국수는 유난히 좋아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같은 밀가루 한 포대에서 태어난 두 음식이 반백 년이 넘도록 내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른 계절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수제비를 보면 신작로의 흙먼지가 떠오른다.

터진 손바닥과 아버지의 괭이질, 뙤약볕 아래 망태기를 들고 오가던 열 살짜리 아이가 떠오른다.

그러나 국수를 보면 갯벌이 떠오른다.

바닷물이 멀리 물러간 자리,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던 갯벌의 감촉, 바구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던 생합과 저녁 부엌에서 피어오르던 국수의 김이 떠오른다.

하나는 배고픔의 맛이고, 하나는 살아내는 맛이었다.

돌이켜보면 그해 여름은 어린 나에게 세상살이의 이치를 너무 일찍 가르쳐준 셈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

밀가루 한 포대에도 아버지의 괭이질과 어린 아들의 땀, 흙먼지와 터진 물집이 값으로 매겨져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 배운 것이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모든 날의 맛까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똑같이 배고픈 날에도 어떤 저녁은 수제비였고, 어떤 저녁은 조개국수였다. 사람은 궁핍 속에서도 기어이 조금 더 맛있는 한 끼를 만들어냈고, 때로는 그 한 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단한 하루를 견뎠다.

어쩌면 가난한 시절을 살아낸 힘은 거창한 희망 같은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에는 국수를 먹는다.’

그 작은 기다림 하나만으로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 나는 밀가루 한 포대를 얻기 위해 땅 한 평을 파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산다.

마트에 가면 밀가루도 국수도 산처럼 쌓여 있고, 돈 몇 푼이면 원하는 것을 골라 먹는다. 그런데도 세월이 지워버리지 못한 것들이 있다.

신작로에서 아버지 곁을 따라다니며 나르던 흙 한 망태기의 무게.

터진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던 망태기 끈.

갯벌을 구르던 어린 발바닥에 걸려오던 생합의 매끈한 감촉.

그리고 저녁 무렵 부엌에서 피어오르던 조개국수의 김.

아버지도 어머니도 떠나고, 그 신작로와 갯벌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혀와 손끝에는 세월보다 오래 사는 기억이 있는 모양이다.

수제비 한 그릇 앞에서 나는 아직도 신작로에서 흙을 나르던 열 살짜리 아이가 되고, 조개국수 한 그릇 앞에서는 빈 바구니를 들고 갯벌로 달려가던 아이가 된다.

라떼는 말야~

한 평의 땅을 파야 밀가루 한 포대가 생겼다.

아버지가 땅을 파면 아들이 흙을 날랐고, 그 흙먼지가 밀가루가 되어 밥상으로 돌아왔다.

그 밀가루 한 포대가 어떤 날에는 허기를 달래는 수제비가 되었고, 운 좋은 어떤 날에는 기다림마저 맛있었던 조개국수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난을 먹으며 자랐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시절의 한 그릇은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에게 가장 오래 남는 맛은 혀로 먹었던 맛이 아니라, 그 시절을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먹었던 맛인지도 모르겠다.


댓글

  1. 나도 그 시절을 살아봐서 공감하는 글입니다. 그런데 글쓴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때로 추억이 맛나니가 돼서 그런지 꽁보리밥에 열무김치 설어넣고 비벼먹는 것도 괜찮던데요? 수제비도 그렇고요. ㅎㅎ
    저도 자주 먹으라면 아마 기겁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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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꽁보리밥에 열무김치 썰어넣고 참기름이나 들기름, 그도 아니면 유채기름을 조금 치고 비비면 먹을만 하지요. 그런데 저는 기름 한 방울 없는 집에서 살았더랬습니다. 그러니 그 거친 보리가 목에 넘어갔겠습니까? ㅎㅎㅎㅎ
    그리고 수제비든 칼국수든 멸치나 새우 같은 해물을 우린 국물이 감칠 맛이 나야 맛있지, 재래식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 장국에 띄운 뜨거운 것을 씹고 삼키는 건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음식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독자님이 기억하시는 음식은 저도 상상만으로도 맛있을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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