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성황산에서
― 6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은 초록불덩이의 기억
나는 귀신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육십 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동, 지금의 선은3리 앞 성황산에서 한여름 밤마다 보았던 초록불덩이들입니다.
그것도 나 혼자 본 것이 아닙니다.
동네 꼬마 예닐곱이 모정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몇 시간씩 함께 보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세 살 아래 제 동생입니다. 그 '동네꼬마녀석들' 모두 70객이 됐으니 아직은 다들 살아있을 나이입니다.
수박만 한 초록불덩이들이 산등성이를 오르내렸습니다.
굴러 내려오다가 다시 산을 거슬러 올라갔고, 때로는 수십 미터씩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졌습니다. 둘이 하나로 합쳐지기도 했고 하나가 다시 둘로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수박만 하던 것이 주먹만 하게 오므라들었다가 다시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여름 밤 내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해 봄, 성황산에서 있었던 사고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호르라기가 울렸는데 폭발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선은동은 성황산 북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약 마흔 가구, 이백 명 남짓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을 집들은 거의 모두 남향이었습니다. 마루에 앉으면 성황산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였습니다.
성황산은 상소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습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이 산에 올랐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전해집니다.
해발 백 미터 남짓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부안 들판과 갯벌, 멀리 바다까지 한눈에 펼쳐집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내게 성황산은 역사책 속의 산이 아니었습니다.
돌을 캐던 산이었습니다.
질 좋은 돌이 많았던 모양인지 산허리를 파먹으며 채석 작업이 계속됐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다이너마이트 발파를 두고 '남포를 튼다'고 했습니다.
발파하기 전이면 호르라기를 불어댔습니다. 신작로의 사람과 차량을 막고 한바탕 야단법석이 벌어졌습니다.
그러고 잠시 기다리면,
꾸당!
산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돌덩이들이 허공으로 솟구쳤습니다.
주먹만 한 돌멩이는 물론이고 어른 두어 명이 달라붙어야 옮길 만한 바위까지 수십 미터씩 날아오르곤 했습니다. 그래서 채석장 아래 개간한 논밭에서는 날아든 돌을 골라내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호르라기가 울렸습니다.
우리는 폭발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터지지 않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호르라기가 울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꾸당!' 하고 터졌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조용했습니다.
몇 분이 지났습니다.
십여 분쯤 되었을까요.
채석장 쪽으로 인부 몇 사람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리 꼬마들도 이상했습니다.
"왜 안 터지지?"
"뭐가 잘못됐나?"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인부들이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꾸당!
늦게 다이너마이트가 터졌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덜컥했습니다.
방금 사람들이 그쪽으로 올라갔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밤 산에서 곡소리가 내려왔다
그날 낮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1961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으니 사고가 1963년이었다면 3학년, 1964년이면 4학년, 1965년이었다면 5학년이었을 것입니다.
정확한 사고 연도는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의 광경은 기억합니다.
산중턱 채석장이 환하게 밝혀졌습니다.
천막이 여러 개 쳐졌습니다.
그리고 곡소리가 들렸습니다.
사고 현장은 우리 마을 동청, 그러니까 신석정 선생 고택 앞에 있던 모정에서 직선거리로 150미터 남짓이었습니다.
너무 가까웠습니다.
보기 싫다고 보지 않을 수도 없었고, 듣기 싫다고 듣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에도 독경 읽는 소리가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요령을 흔드는 쇳소리가 들렸고, 그 사이사이 가족들이 울부짖는 곡성이 밤공기를 갈랐습니다.
초혼제도 있었습니다.
사흘장이 치러졌고 상여가 나갔습니다.
상여는 사고가 난 채석장 앞에 멈춰 노제를 지냈습니다.
그때 들었던 곡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불발된 다이너마이트의 원인을 확인하러 인부들이 올라가던 중 뒤늦게 폭발했다고 했습니다.
나는 희생자가 일곱 명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섯 명 이상이었다는 기억만큼은 비교적 확실하지만,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신문을 뒤졌습니다.
『부안군지』도 찾아봤습니다.
전북지역 신문이며 옛 중앙지 기사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 기사 한 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글에서 사고 연도와 희생자 수만큼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사고가 있었다는 것과 그날 내가 보고 들은 광경은 내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봄이 지나갔습니다.
여름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습니다.
"도깨비불이닷!"
당시 선은동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집집마다 호롱불을 켜던 시절입니다.
해가 지고 나면 시골의 밤은 지금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어두웠습니다.
여름이면 동네 꼬마들은 동청 마루에 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깨비불이닷!"
우리는 일제히 성황산을 바라봤습니다.
사고가 났던 바로 그 산중턱이었습니다.
초록불덩이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불꽃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모양이 달랐습니다.
둥글었습니다.
크기는 대체로 수박 한 덩이만 했습니다.
그 불덩이가 산등성이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가 둘이 되고, 너댓 개가 뒤따랐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일곱 개쯤으로 보였습니다.
초록불덩이들은 산비탈을 굴러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아래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산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한달음에 치고 올라가다가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쳤습니다.
십 미터인지 이십 미터인지, 어떤 때는 삼십 미터쯤 되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다시 굴렀습니다.
또 올라갔습니다.
또 솟구쳤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두 불덩이가 가까워지더니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둘로 갈라졌습니다.
크기도 변했습니다.
대체로 수박만 했지만 갑자기 훨씬 크게 부풀 때가 있었고, 반대로 주먹만 하게 사그라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꺼지는가 싶으면 다시 부풀었습니다.
다시 수박만 해졌습니다.
나는 지금도 '불꽃'이라는 말보다 불덩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본 것은 흔히 생각하는 이글거리는 화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둥근 초록불덩이였습니다.
보름달이 떠도 나타났다
이 현상이 한두 번으로 끝났다면 지금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착각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름 내내 계속됐습니다.
습한 날에는 더 잘 보였던 것 같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흐린 날에만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맑은 날에도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는 밤에도 그 초록불덩이들은 성황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우리는 동청 난간에 걸터앉아 그것을 바라봤습니다.
잠깐 멈추는 때도 있었습니다.
삼십 분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나타났습니다.
한가메로 넘어가는 길에서 말구루마를 몰고 가는 마부의 육자배기가 밤공기를 타고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중 누군가는 어른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아는 체하며 늘어놓았습니다.
"도깨비는 말 피를 뿌리면 사라진다더라."
그러면서도 아무도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밤 11시 30분.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야 우리는 동청에서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뒤 몇 시까지 불덩이들이 움직였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밤이 여름 내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도채비에 홀릴라!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야야! 너무 자주 보지 말아라. 홀리면 큰일 난다."
그 말씀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당시 어른들에게 도깨비는 과학으로 설명해야 할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함부로 건드리거나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무섭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불덩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린 마음에 자꾸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원통해서 저러는구나.
절통해서 저러는구나.
아침에 일하러 나왔을 때만 해도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아내가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자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폭발 한 번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초혼제를 지내던 소리.
요령 소리.
상여가 사고현장에 멈춰 섰던 모습.
그리고 가족들의 곡소리.
그것들을 보고 들은 뒤였기 때문이었을까요.
내 눈에는 산등성이를 미친 듯이 치달아 오르다 굴러 떨어지고, 다시 솟구쳤다가 곤두박질치는 초록불덩이들이 단순한 불빛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로 다 토해내지 못한 원통함을 토해내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야 했던 억울함,
두고 온 식구들에게 마지막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절통함을 견디지 못해,
산허리를 구르고 또 구르며 몸부림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국민학교 3~5학년쯤 되었던 한 소년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십 년이 지난 지금 그 광경을 떠올려도, 나는 초록색보다 먼저 그들의 곡소리를 기억합니다.
그 초록불덩이들이 다음 해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그곳에 올라가 보았다
몇 년이 지나 중학생이 된 뒤 나는 일부러 채석장을 몇 차례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건너다보기만 했던 곳을 직접 올라가 본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본 채석장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산 한쪽을 제법 깊숙이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아직 깨내지 못한 거대한 암석은 암벽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저 단단한 바위에 천공을 했을 것이다.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쑤셔 넣었을 것이다.
도화선을 연결하고 그것을 끌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불을 붙였을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인부들이 느꼈을 두려움이 실감났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하고 산비탈을 내려오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날처럼 불이 붙지 않았을 때, 다시 그곳으로 올라가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중학생이 된 나는 비로소 어린 시절 멀리서 바라보던 그 몇 분이 얼마나 무서운 시간이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을까
세월이 흘러 나는 이공계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이야기를 무조건 신비한 현상으로 남겨 두는 것도 내 성미에는 맞지 않습니다.
검색을 해봤습니다.
흔히 '도깨비불' 또는 서양에서 '윌오더위스프(will-o'-the-wisp)'라 부르는 현상을 두고 유기물이 부패하면서 생기는 여러 기체와 발광 현상, 자연발화 가능성 등을 이야기하는 과학적 설명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과학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이 설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는 아직 질문이 남습니다.
왜 우리가 본 것은 불꽃이 아니라 수박처럼 둥근 불덩이였을까.
왜 대체로 그 크기를 유지했을까.
왜 주먹만 하게 작아졌다가 다시 수박만 하게 부풀었을까.
왜 둘이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졌을까.
왜 산비탈을 내려오기만 하지 않고 거꾸로 치달아 올라갔을까.
어떻게 수십 미터씩 허공으로 솟구쳤을까.
왜 비 오는 밤뿐 아니라 맑은 밤에도 나타났을까.
보름달이 산을 환하게 비추던 밤에도 그것들은 왜 그대로 보였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왜 그것이 한 번의 현상이 아니라 여름 내내 되풀이되었을까.
모르겠습니다.
정말 자연현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거리와 크기를 잘못 판단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육십 년이라는 세월이 기억의 어느 부분을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본 것까지 없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었으니까요.
내 동생도 보았습니다.
동청에 함께 앉아 있던 동네 꼬마들도 보았습니다.
기창이, 항곤이, 수일이, 광수, 상수, 행수, 연출이, 태용이, 병학이, 병철이, 경곤이, 철승이, 세일이, 병재.......
우리 마을 집들은 대부분 남향이었고 집집마다 마루에서 성황산이 정면으로 보였습니다. 여름밤 마루에 나와 있던 어른들 가운데서도 그 불덩이를 본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나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1995년 고향 선은3리를 다시 찾았을 때 옛 토박이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대전이며 인천 등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마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한때 마흔 가구, 이백 명 남짓이 함께 살았던 마을 사람들이 세월을 따라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그때 조금 더 찾아볼 걸 그랬습니다.
"그해 여름 성황산에서 초록불덩이 본 사람 없습니까?"
왜 그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그래서 육십 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기록으로 남겨 둡니다.
사고가 정확히 몇 년에 일어났는지.
희생자가 다섯 명이었는지 일곱 명이었는지.
왜 당시 신문기사 한 줄을 지금까지 찾지 못하는지.
그리고 사고가 난 그해 여름 성황산에서 나타났던 초록불덩이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 모릅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 내 기억 속의 그 불덩이들은 여전히 성황산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합쳐졌다가 갈라지고,
산비탈을 굴러내렸다가 다시 치달아 오르고,
느닷없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불덩이를 바라보던 국민학생 하나는 자꾸만 생각합니다.
원통해서 저러는구나.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리워서 저러는구나.
어쩌면 그 여름 내가 본 것은 도깨비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고현장에서 며칠 동안 들었던 곡소리와, 어린 나이로는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죽음의 슬픔을 초록불덩이 속에 겹쳐 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초록불덩이의 정체를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불덩이들을 바라보던 그때의 내 마음은 설명해 줍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1963~1965년 무렵 부안읍 성황산 채석장 발파사고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그해 여름 선은동에서 우리와 함께 그 초록불덩이를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부디 연락해 주십시오.
이제는 나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겨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여름 동청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성황산을 바라보던 고향 친구들이 몹시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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