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야~" 제 5탄 - 장난감은 없었지만 놀 줄은 알았다



흙 한 평이면 하루가 짧았던 아이들

요즘 아이들 방에 들어가 보면 가끔 놀란다.

자동차며 로봇이며 전자게임이며,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장난감이 방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새 장난감이 생긴다. 그런데 그렇게 갖고 싶다고 졸라서 사준 장난감을 반나절 가지고 놀다가 싫증 내는 모습도 흔히 본다.

그럴 때면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뭘 가지고 놀았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참 기가 막힌다.

깨진 옹기조각이었다.

지금 같으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물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주워 놀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으로 놀이를 만들어냈다.

깨진 옹기조각 하나면 충분했다

196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에게 돈을 주고 사는 장난감은 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깨진 장독이나 사기그릇 조각 가운데 납작하고 쓸 만한 것을 하나 골라 주웠다. 모서리가 날카로우면 돌에 문질러 둥글게 다듬었다. 잘 다듬어진 사금파리 하나가 생기면 그것으로 준비는 끝이었다.

흙마당에 금을 그었다.

그냥 선만 표시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여러 아이가 뛰어다니고 사금파리를 던져도 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흙바닥이 조금 패일 만큼 깊숙이 금을 그었다.

그리고 네댓 명이 둘러섰다.

우리는 그 살이를 **‘팔강살이’**라고 불렀다.

요즘 자료를 찾아보면 이와 같은 계통의 놀이는 돌차기·사방치기라고 기록되어 있고, 지역에 따라 팔방치기·깨금집기·목자놀이·밭전놀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납작한 돌을 놀이 도구로 사용하고 한 발로 칸을 이동하는 놀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자란 시골에서 우리 아이들이 부르던 이름은 분명 팔강살이였다.

‘팔강’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아직 믿을 만한 문헌 근거를 찾지 못했다. ‘팔방’이 변해서 ‘팔강’이 된 것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는 게 낫다.

대신 이름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몸의 기억이다.

깨금발로 뛰고, 양발로 내려서고

팔강살이 판에는 한 칸짜리와 두 칸짜리가 있었다.

한 칸에서는 반드시 깨금발로 착지해야 했다. 두 칸이 나란히 나오면 두 다리를 벌려 양발로 착지했다.

놀이판에는 네 모서리를 대각선으로 이은 X자가 그려진 칸도 반드시 하나 있었다.

먼저 사금파리나 잘 다듬은 옹기조각을 칸 안으로 던졌다.

멀리 던질수록 유리했다.

그러니 어린 마음에 욕심이 났다.

결승점 가까이 한번에 던져놓으면 남보다 훨씬 유리할 것 같았다. 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해 사금파리가 금 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대로 실격이었다.

무작정 멀리 던진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사금파리가 제대로 안착하면 그곳까지 한 칸에서는 깨금발, 두 칸에서는 양발을 사용하며 전진했다.

도착하면 사금파리를 집어 발등 위에 얹었다.

그다음부터가 기술이었다.

발등을 툭 차올려 사금파리를 공중에서 한 바퀴 돌게 한 다음 손으로 받아냈다. 그리고 다시 깨금발과 양발을 번갈아 사용해 결승점까지 가야 했다.

생각해보면 깨진 옹기조각 하나를 가지고도 별 기술을 다 부렸다.

정확히 던져야 했다.

균형을 잡아야 했다.

한 발로 뛰어야 했다.

힘을 조절해야 했다.

발등의 사금파리를 차올려 손으로 받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됐다.

멀리 가겠다고 너무 세게 던지는 순간 금 밖이었다.

흙에 구멍 다섯 개만 파면 또 다른 놀이터가 생겼다

구슬 몇 알이 생기면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우리가 **‘뎅깡’**이라고 부르던 구슬치기가 있었다.

흙바닥에 아이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동그란 홈을 다섯 개 팠다.

가운데 하나.

그리고 그 중심 구멍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네 개를 더 팠다. 바깥쪽 네 구멍을 서로 이어본다면 커다란 마름모꼴이 되는 배치였다.



구멍 사이도 바짝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슬을 튕겨 이동해야 할 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놀이판에서 네댓 발짝 떨어진 곳에 출발 금을 그었다.

아이들은 거기서 자기 구슬을 던졌다.

구멍에 곧바로 들어간 아이가 우선권을 얻었고,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면 구멍 가까이 떨어뜨린 아이가 먼저 시작했다.

어느 구멍부터 들어가야 한다는 순서는 없었다.

자기 구슬에서 가까운 구멍부터 공략하면 됐다.

그런데 구멍만 찾아다녔다면 그토록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뎅깡의 묘미는 남의 구슬을 때리는 데 있었다.

왼손을 흙바닥에 붙이고 손가락을 세운다. 그 위쪽으로 오른손을 가져가 가운데손가락 손톱 위에 구슬을 놓고 힘을 조절해 튕겼다.

상대 구슬이 좋은 자리에 붙어 있으면 그것을 겨냥했다.

탁!

제대로 맞으면 상대 구슬이 저만치 달아났다.

얼마나 고소했겠는가.

ㅋㅋㅋ.

하지만 남의 구슬을 멀리 쫓아내겠다고 욕심을 부려 너무 세게 때렸다가는 내 구슬까지 멀리 달아났다.

그래서 뎅깡도 힘 조절이 중요했다.

팔강살이에서는 사금파리를 너무 멀리 던지려다 금 밖으로 나가고, 뎅깡에서는 남의 구슬을 멀리 보내겠다고 욕심을 내다 내 구슬까지 달아났다.

그때는 몰랐지만 세상살이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욕심은 언제나 힘 조절을 어렵게 한다.

우리는 ‘놀이’보다 ‘살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돌이켜보면 우리 동네 아이들의 말에는 유난히 **‘살이’**가 많이 붙었다.

팔강살이도 그랬고, 네 발로 땅을 기어다니며 놀던 뻘덕게살이도 있었다. 

오늘 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행위를 '세상살이'로 부르는 말과 같은 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머슴애와 계집애가 짝이 되어 서방과 각시 역할을 하며 어른들의 살림살이를 흉내 내던 빠꼼살이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소꿉놀이라고 하면 금방 알아듣지만 우리 입에는 빠꼼살이가 훨씬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1960년대 부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쓰던 말이다.

지역어라는 것이 그렇다.

바로 옆 고을만 넘어가도 이름이 달라지고, 같은 놀이도 동네마다 규칙이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을 글로 옮길 때면 더욱 조심스럽다.

내 기억에는 분명한 말이라도 문헌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전국에서 통용되던 말처럼 써서는 안 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불렀고, 그렇게 놀았다.

그것 역시 한 시대의 언어이고 생활이었다.

흙마당은 우리들의 가장 큰 장난감이었다

팔강살이와 뎅깡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치기도 흙이 있어야 했다.

구슬치기도 흙이 있어야 했다.

막대기 하나 주우면 땅에 금을 그을 수 있었고, 손가락이나 돌멩이로 땅을 파면 금세 새로운 놀이판이 생겼다.

놀다가 싫증이 나면 발로 쓱 문질러 지워버렸다.

그리고 또 다른 금을 그었다.

생각해보면 흙마당 자체가 우리들의 가장 큰 장난감이었다.

흙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선을 그으면 경기장이 되었고, 구멍을 파면 구슬치기 판이 되었다. 아이들이 규칙을 정하면 그 순간부터 그곳은 우리들만의 세상이 되었다.

돈 한 푼 들지 않았다.

장난감 가게에 갈 필요도 없었다.

흙 한 평과 친구 네댓 명이면 됐다.

시멘트가 덮어버린 것은 흙뿐이었을까

세상은 좋아졌다.

비만 오면 질척거리던 길이 포장되었고, 흙먼지가 날리던 마당에는 시멘트가 깔렸다.

깨끗해졌다.

편리해졌다.

대한민국은 이제 1조 달러 수출을 이야기할 만큼 성장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깨진 옹기조각 하나를 주워 놀라고 하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구멍을 파고 놀라고 권할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나부터도 손주가 날카로운 사기조각을 주워 들고 놀겠다고 하면 기겁하며 빼앗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든다.

장난감은 우리가 어릴 때보다 백 배, 천 배 많아졌는데 자기 손으로 놀이터를 만들어볼 기회는 오히려 줄어든 것 같아서다.

아파트 화단을 파헤쳐 구슬구멍을 만들 수는 없다.

시멘트 바닥을 막대기로 파서 팔강살이 금을 그을 수도 없다.

놀이터에 가도 모든 것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미끄럼틀도 만들어져 있고 그네도 만들어져 있고, 어디로 올라가서 어디로 내려와야 하는지까지 어른들이 설계해놓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놀이터부터 우리가 만들었다.

그리고 흙마당이 사라지면서 또 하나 사라진 것이 있다.

동네 아이들이다.

“야, 나와!”

사립문 밖에서 한 놈을 부르면 하나가 나오고, 그놈이 또 하나를 불렀다.

어느새 네댓 명이 되었다.

약속시간도 없었다. 부모가 자동차로 데려다줄 필요도 없었다.

아이들만 모이면 놀이가 생겼다.

그래서 하루가 짧았다.

흙과 멀어지면서 내 몸도 자연과 서먹해진 것일까

나는 어린 시절 흙먼지를 참 많이도 먹고 자랐다.

흙바닥에 왼손을 붙이고 구슬을 튕겼고, 맨땅을 깨금발로 뛰어다녔다. 풀밭이고 논둑이고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 시절의 나는 적어도 알레르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미국으로 이민을 와 살면서 몇 년이 지나자 봄이면 콧물과 재채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풀밭에 앉았다 일어나면 온몸이 가렵다.

봄철이면 알레르기약을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 나름의 경험칙 하나를 가지고 있다.

흙과 풀을 멀리하며 살면서 내 몸도 자연과 서먹해진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살아오며 몸으로 느낀 생각이다.

흙에서 놀았기 때문에 알레르기가 없었다거나 흙먼지를 마시면 알레르기가 예방된다고 말할 의학적 근거는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현대 면역학에서도 이와 아주 동떨어지지 않은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역학연구에서 **전통적인 농장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천식과 알레르기 질환이 적게 나타나는 이른바 ‘농장 효과(farm effect)’**가 관찰돼 왔다. 최근 연구들은 단순히 ‘더러운 환경이 좋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접하는 환경 미생물의 다양성, 장내 미생물군의 발달, 식생활 등이 면역계의 성숙과 관련될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다. 

더욱 묘하게 내 경험과 겹치는 연구도 있다.

미국 시카고의 한국계 이민자 246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미국에 온 뒤 처음 알레르기성 비염 증상이 생긴 사람들이 관찰됐으며, 미국 도착 후 증상 발생까지의 평균 기간은 8년이었다. 흔한 알레르겐 가운데는 돼지풀 꽃가루도 포함돼 있었다. 연구진은 이민 후 달라진 환경적 요인에 주목했다. 

물론 이것 역시 내가 흙마당에서 놀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알레르기가 없었다는 증명은 아니다.

그 둘을 억지로 연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 몸으로 겪은 경험과 현대 의학이 관찰하고 있는 현상이 묘하게 마주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연과 훨씬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아이들은 조금 더러워져도 된다

그렇다고 다시 흙길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비만 오면 진창이 되던 길보다 포장도로가 좋고, 흙먼지 날리는 집보다 깨끗한 집이 좋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풍요를 이제 와서 나쁘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다만 풍요를 얻으면서 잃어버린 것 가운데 되찾아줄 만한 것이 무엇인지는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조금 더 흙을 만졌으면 좋겠다.

풀물이 무릎에 들어도 좋고, 손톱 밑에 흙이 끼어도 좋다.

벌레 한 마리를 들여다보고, 풀밭을 뛰다가 넘어져 무릎의 흙을 툭툭 털고 다시 뛰어갔으면 좋겠다.

모름지기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야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가난했다.

장난감도 변변히 없었다.

그러나 가난했다고 해서 어린 시절까지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깨진 옹기조각 하나를 주워 모서리를 둥글게 갈면 훌륭한 놀잇감이 생겼다.

막대기 하나로 흙마당에 금을 그으면 경기장이 생겼다.

구슬 몇 알과 친구 네댓 명만 있으면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오늘날 아이들에게는 우리가 꿈도 꾸지 못했던 장난감이 넘쳐난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은 백 배 많이 주면서,

놀 수 있는 세상은 백 배 좁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장난감이 없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놀 것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덧붙이는 고증

이 글에서 ‘팔강살이’, ‘뎅깡’, ‘뻘덕게살이’라는 명칭과 세부 놀이법은 필자가 1960년대 전북 부안에서 직접 사용하고 경험했던 말과 놀이를 기억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 같은 계통의 놀이가 다른 지역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과 규칙으로 전승되었으므로 이를 전국 공통의 명칭이나 놀이법으로 일반화하지 않았다.

특히 ‘팔강’의 어원과 ‘뎅깡’의 어원은 현재 신뢰할 만한 국어학적 출전을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추정하지 않았다. ‘뎅깡’을 일본어에서 온 말이라고 기억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신뢰도 높은 어원자료가 확인될 때까지 본문에서는 일본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알레르기에 관한 개인적 경험 역시 의학적 인과관계와 구별하였다. 농장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과 소아 천식·알레르기 위험 감소 사이의 연관성은 여러 연구에서 보고됐지만, 이는 흙먼지에 많이 노출될수록 건강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구에서는 미생물 다양성, 장내 미생물군, 식생활과 면역계 발달 등 복합적인 요인을 살펴보고 있다. PubMed Central (PMC) +2

주요 참고자료: Frei R, Heye K, Roduit C., Environmental influences on childhood allergies and asthma — The Farm effect, Pediatric Allergy and Immunology, 2022. � / Kim AS, Majmudar SP, Yu BH., Allergic rhinitis in Korean immigrants to the United States, Allergy & Asthma Proceedings, 2006. PubMed

놀이의 이름이나 규칙 등 필자의 기억과 다른 기억을 가진 분들의 댓글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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