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야~" 제 6탄 - 수출 이야기

 


                 울엄니 머리칼도 수출했었다

― 완도김의 바다 냄새에서 수출 1조 달러까지

‘라떼는 말야’

이 말을 꺼내면 젊은 사람들은 벌써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기어이 옛날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지난 9월 우리나라 수출이 한 달에 1,200억 달러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엉뚱하게도 육십 년 저쪽의 김 냄새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열 살 무렵까지였던 것 같다. 정월대보름 아침이면 시루에 찐 오곡밥을 완도김에 싸 먹었다. 따뜻한 밥을 감싼 김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던 바다 냄새. 입에 넣으면 밥의 구수함과 김의 향이 한데 어울려, 정말이지 눈물 나게 맛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냄새를 잊지 못한다.

요즘도 밥상에는 거의 날마다 김이 오른다. 그런데 그때 그 냄새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내 혀가 늙은 것인지, 김이 달라진 것인지, 어린 시절의 허기가 맛까지 붙들어놓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억 속 그 김은 지금 먹는 김과 분명히 다르다.

좋은 김은 일본으로 수출돼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김이 해외로 나갔고, 그것이 우리 동네 밥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까지 내가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것은 외화를 벌러 나간다는 말이 낯설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라가 달러를 벌어야 산다는데, 어린 우리가 그 사정을 알 리 있었겠는가. 아이에게는 나라 곳간보다 입 안에서 멀어진 맛이 먼저였다.

전쟁 뒤 원조에 기대어 버티던 나라였다. 미국의 무상원조가 1950년대 후반부터 줄어들자, 필요한 물자와 원자재를 사 올 외화를 스스로 벌어야 할 압박도 커졌다. 팔 만한 공산품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다. 김과 생사, 광물과 농수산물까지, 팔 수 있는 것에서 달러를 찾아야 했다. �theme.archives.go.kr +2

1964년에는 연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내가 오곡밥을 김에 싸 먹던 무렵, 나라는 수출 1억 달러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www.much.go.kr

그 수출품 속에는 울엄니의 머리카락도 있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울엄니 머리칼도 가발이 되어 수출되었다.

가발 수출이 한창이던 때, 어머니들은 찰랑찰랑하던 고운 삼단머리칼을 썩둑 잘랐다. 곱게 빗어 쪽을 지던 머리였다. 그 머리칼을 팔아 쌀을 사고, 아이들 학비에 보탰다. 몸에 지닌 것을 내어 자식들 밥과 배움을 마련한 것이다.

나라의 장부에는 가발 수출액으로 적혔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쌀과 학비가 됐고, 내 기억에는 울엄니의 잘린 머리로 남았다.

그 무렵 내 기억 속 중년과 노년의 어머니들 머리는 하나둘 뽀글이 파마로 바뀌어갔다. 쪽진 머리들이 멀어지고, 동네 어머니들의 머리 모양이 서로 닮아가던 풍경도 기억난다. 그 변화를 모두 가발 수출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출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 어머니들의 얼굴과 머리 모양까지 함께 떠올리게 된다.

수출 100억 달러를 국가목표로 내걸고 달려가던 1970년대에는 더 기막힌 풍경도 있었다. 

학교 변소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놓였던 소변통이다.

소변까지 모아 약을 만든다니, 그때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의 소변에서 혈전을 녹이는 효소인 유로키나제를 추출해 의약품을 만들었고, 그것도 수출품이 됐다. 녹십자는 1973년 국내 최초로 유로키나제를 개발했다. �www.cancer.gov +2

좋은 김을 팔고, 어머니의 머리칼을 팔고, 화장실에서 모은 소변까지 약의 원료로 삼았다. ‘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내다팔았다’는 말이 그저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소변통의 지독한 냄새는 아직 기억나는데, 그 통들은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나라는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기념식장의 박수와 축하 속에는 그런 생활의 냄새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db.history.go.kr

오일장이 서면 장마당에 퍼지던 냄새도 잊히지 않는다. 구수하면서도 꼬릿한 생선 굽는 냄새에 막걸리 냄새가 어우러졌다. 가난에 허덕이다가도 명절에나 한 번 맛보던 굴비, 살이 통통하던 마른오징어. 그 맛과 냄새는 요즘 건어상 앞에서 만나는 것과 많이 다르다.

그저 나이 탓이라고만 넘기기에는 너무 또렷한 기억들이다.

그때는 좋은 것들이 수출로 빠져나가고, 우리에게는 덜 맛든 것들이 남는다고 느꼈다. 옛맛이 달라진 데에는 어종과 가공법, 유통과 식습관의 변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린 내게는, 귀한 것을 바깥에 팔아야 살림을 꾸릴 수 있다는 가난의 사정이 먼저 와닿았다.

이제는 맛있는 것들을 우리 식탁에 먼저 올려도 될 만하지 않을까.

몇 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식당마다 맛있는 해물요리가 그릇에 그득그득 담겨 나오는 것을 보며 감개가 새로웠다. 이렇게 넉넉히 먹는 나라가 됐구나. 어린 날 명절 밥상에서나 기다리던 맛을 이제는 식당에서 골라 먹을 수 있구나. 그 풍성한 접시 앞에서, 나는 우리가 지나온 세월을 새삼 느꼈다.

김의 변신도 놀랍다.

지난해 우리나라 김 수출액은 약 11억 3천만 달러였다. 1964년 온 나라가 처음 넘어섰던 수출 1억 달러의 문턱을, 이제 김 한 품목이 열한 배 넘게 웃도는 셈이다. 시대가 다른 명목 달러 금액의 비교라 해도, 그 규모의 변화는 놀랍다. �admin.korea.kr +1

엊그제는 김부각 위에 서양식 고명을 얹어 안주로 즐기는 유튜브 영상을 봤다. 바삭한 김부각이 다른 나라의 재료를 받치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에는 오곡밥을 감싸던 김이, 그 화면에서는 전혀 새로운 음식의 바탕이 돼 있었다.

남의 것을 받아 우리 식으로 먹기만 하던 때를 지나, 우리 음식도 다른 나라의 재료와 만나 새로운 맛으로 번져가고 있다. 김 한 장이 건너간 자리에 먹는 방식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연간 수출 1조 달러를 바라본다.

지난 9월 수출은 1,209억 4천만 달러,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누적 수출은 8,145억 달러였다. 정부도 올해 연간 수출 1조 달러 달성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아직 이루지 않은 기록이지만, 남은 석 달에 필요한 수출액은 1,855억 달러다. 문턱이 눈앞에 와 있다. �www.motir.go.kr

어쩌면 이번 수출 대박은 AI 열풍이 안겨준 ‘자다가 생긴 떡’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9월에는 반도체 한 품목의 수출만 603억 달러로 전체의 거의 절반이었다. 세계가 AI에 몰려들면서 우리 반도체를 찾는 수요가 크게 늘어난 덕이다. �www.motir.go.kr +1

그러나 그 떡을 받아낼 기술과 공장은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들의 잘린 머리칼에서, 밤늦도록 공장을 지킨 노동자들의 손에서, 수십 년 쌓아온 연구와 도전에서 오늘의 밑천이 만들어졌다. 행운이 찾아왔어도 붙잡을 실력이 없었다면 우리 몫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호황이 몇 년이나 이어질지는 모른다. 다만 언제가 되든, 일본조차 아직 이루지 못한 연간 상품수출 1조 달러의 문턱을 우리가 넘어서는 날, 그 감격을 한때 운이 좋았던 시절의 추억으로 남기지는 않았으면 한다. �scraping-agency.com +2

정부와 기업, 연구실과 생산 현장은 물론 국민 누구라도 지혜를 보탤 수 있도록 널리 길을 열어야 한다. 무엇을 더 만들고, 어떤 기술을 키우고, 반도체 뒤를 이을 산업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지 함께 궁리해야 한다. 그렇게 번 돈이 좋은 일자리와 국민의 넉넉한 밥상으로 돌아오게 할 방법도 함께 찾아야 한다.

울엄니의 머리칼까지 팔아 달러를 모으던 나라가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다음 세대가 무엇을 내어주어야 살아갈지를 걱정하는 대신, 무엇을 이루며 살아갈지를 꿈꾸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수출 1조 달러가 그날의 축포로 끝나지 않고, 오래도록 국민의 삶을 받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고로, 1946년 수출 통계가 잡힌 이래로 올 9월 까지 우리나라의 수출액들을 모조리 더해봤더니 놀랍게도 물경 14조 3천억 달러였다. 재미삼아 계산기를 두들겨 보긴 했지만 경이로운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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