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노트1 - 노던블러바드 한인타운(Northern Blvd. Korea Town)

Short Fiction · 가상소설
노던 블러바드
또 다시 봄
부산 남천초등학교 5학년 2반 짝꿍을
40년 만에 플러싱에서 마주치다니!

3월의 플러싱은 아직 겨울 끝자락이었다. 노던 블러바드 한인마트 앞에 봄 햇살이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구름 뒤로 숨었다. 진숙은 카트를 끌며 마트 입구를 막 나서다가 멈칫했다.

"...혜원아?"

카트를 밀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모피 코트 깃을 세운 채 선글라스를 낀 여자였다. 아무래도 장을 보러 나온 차림은 아니었다. 3월에 선글라스라니. 진숙은 속으로 웃었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눈이 마주쳤다.

"...진숙이?"

40년이었다. 부산 남천초등학교 5학년 2반. 짝꿍이었다.

마트 옆 순두부찌개 집에 자리를 잡았다. 혜원은 코트를 벗지 않았다. 진숙은 패딩 점퍼 지퍼를 내리며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여기 순두부 괜찮아. 자주 와?"

"처음이야. 우리 애들이 어릴 때 가끔 왔는데, 요즘은 혼자 오기가..."

혜원이 말끝을 흘렸다. 진숙은 못 들은 척 물을 따랐다.

"남편은?"

"한국에. 요즘은 왔다갔다 해. 너는? 남편이..."

"이혼했어. 애들 고등학교 때."

혜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진숙은 그 표정을 보았다. 예전에도 저랬다. 놀라도 티를 안 내려고 애쓰는 얼굴.

"힘들었겠다."

"뭐, 살다 보니까."

순두부찌개가 뚝배기째 나왔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둘 사이의 어색함을 잠시 덮었다.

"아들이 군대를 자원했었어."

진숙이 먼저 꺼냈다. 혜원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자원?"

"응.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엄마가 이발소 하나 붙들고 사는 거 보고 맘이 쓰였나봐. 말도 없이 모병 포스터 보고 지원서 냈더라고."

"아이고..."

"그것도 아프가니스탄 파병 자원을 했어."

혜원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 얘기 듣고 한 달을 잠을 못 잤어. 군인 머리 깎으면서도 손이 떨렸고. 군인 아들 둔 엄마들이 왜 그러는지 그때 처음 알았어."

진숙은 웃으려다 말았다.

"근데 그 녀석이 거기서 4년을 버텼어. 월급이랑 위험수당 모아서 엄마 집 짓는 데 보태준다고 송금을 하는 거야. 나는 받기가 싫어서 그냥 통장에 묵혀뒀지. 온라인으로 대학 과정도 들으면서. 귀국해서는 간호대학원 가서 수간호사 자격증까지 따고 제대를 했어."

"...대단하다."

"백인 아가씨랑 결혼해서 애도 둘 낳았어. 지금은 꽤 잘 살아."

그 녀석이 파병 갔을 때, 나는 매일 밤 이발소 문 닫고 혼자 앉아서 울었어. 내가 제대로 된 가정을 못 만들어줘서 저 애가 저러는 거다 싶어서. 이혼한 게 너무 미안해서.

"지금도 미안해?"

진숙은 잠깐 생각했다.

"지금은... 모르겠어. 미안하긴 한데, 그 애가 그렇게 자란 게 꼭 내 잘못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힘든 걸 겪어봐야 단단해지는 게 있잖아. 나는 그냥 열심히 산 거고, 걔도 그냥 열심히 산 거고."

혜원은 창밖을 보았다. 노던 블러바드를 걷는 사람들. 한국 아줌마들, 중국인 노인들, 멕시코 청년들. 플러싱은 언제나 이렇게 북적였다.

"우리 애들은 하고 싶은 건 다 했어."

혜원이 천천히 말했다.

"돈이 없어서 못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유치원 때 여기 와서 맨해튼 학교 보내고, 과외도 시키고, 방학마다 유럽 데리고 다니고."

"좋았겠다."

"좋았지. 근데..."

혜원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애들이 다 크고 독립하고 나서, 남편이랑 둘이 남았는데. 할 말이 없는 거야. 애들 얘기 말고는. 우리 둘만의 얘기가 없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진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들한테 가끔 그래. 친구 중에 어려운 애가 있는데 도와주고 싶다고 조르거나 선뜻 지갑을 열기가 망설여질 만큼 큰 돈이 필요하다고 부탁할 때, 내 눈치를 살피는 애들한테 나도 모르게 '니들은 부모 잘 만난 줄 알어' 하고 농담처럼 말하거든. 근데 있잖아, 진숙아."

혜원이 진숙을 똑바로 보았다.

"그 말을 할 때 나는 사실 좀 부끄러워. 우리가 애들한테 해준 게 돈밖에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돈도 사랑이지."
"그래?"
"그럼. 나는 돈도 못 줬잖아."

둘이 동시에 웃었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편하게.

찌개 뚝배기가 식어갈 즈음 혜원이 물었다.

"며느리는 어때?"

"착해. 우리 아들이 잘 골랐어. 근데 나는 만날 때마다 꼭 한마디 해."

"뭐라고?"

"웬만하면 이혼하지 말라고. 끝까지 정답게 살라고."

혜원이 잠시 있다가 말했다.

"나도 이혼은 안 해."

"알아."

"...어떻게 알아?"

진숙이 웃었다.

"너 눈빛이 그래. 손해 볼 짓은 안 하는 눈빛."

혜원이 잠깐 굳었다가, 피식 웃었다.

"너 초등학교 때도 그런 말 잘했잖아."

"그랬나."

"응. 짝꿍이 그러면 진짜 섭섭하거든."

마트 앞에서 헤어질 때 혜원이 말했다.

"진숙아, 나는 오늘 네 얘기 들으면서 생각했어. 우리 애들이 좋은 집에서 좋은 것만 보고 자란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진숙은 카트를 반납하면서 대답했다.

"나는 반대로 생각했어. 우리 아들이 고생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둘은 서로를 보았다.

3월의 노던 블러바드에 봄 햇살이 다시 잠깐 나왔다. 이번엔 구름 뒤로 숨지 않았다.

"다음엔 내가 살게."

혜원이 말했다.

"그래. 다음엔 네가 사."

진숙이 카트를 돌리며 걸었다. 혜원은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노던 블러바드는 오늘도 북적였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존 인물 및 특정 사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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