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 전쟁의 명분 : "재외 자국민 보호"
해고의 자유와 고용의 함정
미국과 한국, 두 노동법의 서로 다른 귀결 — 그리고 예고된 균열
미국 노동시장의 근간은 'at-will employment', 즉 임의고용 원칙이다. 고용주는 정당한 이유 없이도, 사전 통보 없이도 직원을 해고할 수 있다. 몬태나 주를 제외한 49개 주 전체에서 이 원칙이 기본값으로 적용된다.
실리콘밸리 빅테크는 이 원칙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왔다.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호황기에 수만 명을 채용하고, 사이클이 꺾이면 발표 당일 수천 명을 내보낸다. 2025년 한 해에만 약 24만 6천 명의 테크 노동자가 레이오프됐다. 고연봉은 이 구조의 반대급부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 제시하는 연봉 20만 달러는 단순한 실력의 보상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성에 대한 위험 프리미엄의 성격이 강하다.
파업은 왜 사라졌는가. 노조 조직률이 1950년대 35%에서 현재 10% 아래로 추락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핵심은 구조적 비대칭이다. 파업을 해도 회사는 파업 참가자를 교체 채용할 수 있고, 복귀한 직원도 사유 없이 해고할 수 있다. 노조의 협상력이 at-will 원칙 앞에서 근본적으로 제한되는 것이다. UPS·자동차 노조(UAW)처럼 산업별 노조가 강한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미국의 개별 노동자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한국 근로기준법은 정반대의 철학 위에 서 있다. 사용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없고, 경영상 정리해고를 하려면 네 가지 요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긴박한 경영상 필요, 해고 회피 노력, 합리적·공정한 해고 기준, 50일 전 사전 통보와 협의. 그리고 그 정당성을 입증할 책임은 기업에 있다.
삼성·현대·LG 같은 대기업은 여기에 강성 노조가 더해진다. 정리해고 시도는 수개월의 단체교섭, 파업, 부당해고 구제신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구조는 역설을 낳는다. 해고가 어렵기 때문에 기업은 애초에 정규직 채용을 꺼린다. 경기 침체기에는 해고 대신 희망퇴직 패키지, 계열사 전보, 사내 유배 같은 우회 수단이 동원된다.
노조의 협상력이 정규직 내부에만 집중될 때 문제는 심화된다. 대기업 노조는 조합원 임금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실은 기존 내부자들에게 편중됐다. 신규 채용은 줄고, 비정규직·하청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보호를 위해 설계된 제도가 특권 집단의 방어막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한국 임금 구조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연공서열제다.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이 체계는 고도성장기에는 직원의 충성심을 담보하는 유효한 도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다. 생산성과 무관하게 연차가 쌓일수록 인건비는 올라가고, 기업은 신규 채용보다 기존 인력을 유지하는 비용을 먼저 감당해야 한다.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청년 신규 채용의 감소다. 인건비 부담이 가중된 기업은 정규직 문을 좁히고, 청년층은 스펙을 쌓으며 취업 준비 기간을 늘린다. 다른 하나는 50대 초반의 조기 퇴직 압박이다. 임금피크제가 그 타협의 산물이었지만, 근본 구조를 바꾸지 않은 봉합책에 그쳤다.
연공서열을 직무·성과 중심 임금 체계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한 임금 개혁이 아니다. 기업이 경기 변동에 따라 인건비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면, 지금처럼 신규 채용 자체를 회피하는 유인이 줄어든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출발점이 해고 규제 완화만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 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채용의 문을 넓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대기업이 정규직 채용 문을 좁히는 동안, 제조현장·건설·농업·돌봄 서비스 등 기피 업종에는 외국인 취업 이민자가 빠르게 유입됐다. E-9 비자(비전문취업) 쿼터는 해마다 확대됐고, 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민은 노동시장의 빈틈을 메우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 질문을 던진다.
단일민족 신화 위에 세워진 사회가 다층화되는 속도는 법과 제도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보호는 여전히 미흡하고, 내국인과의 임금·처우 격차는 구조화되고 있다. 지역사회 갈등, 문화적 마찰, 이중 노동시장의 심화. 고용 경직성이 만들어낸 빈자리를 이민이 채우고, 그 이민이 다시 사회 통합의 과제를 낳는 연쇄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문제의 절반만 본 것이다. 유럽의 경험은 훨씬 더 어두운 미래를 먼저 보여줬다. 프랑스 파리 외곽의 방리유, 영국 버밍엄의 에지바스턴, 독일 베를린의 노이쾰른. 이민자들이 집중 거주하는 이 지역들은 처음에는 저렴한 주거를 찾은 동향인들의 자연스러운 모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언어, 같은 종교, 같은 문화권 안에서만 순환하는 폐쇄적 공동체로 굳어졌다. 주류 사회와의 접점은 줄고, 내부의 결속은 배타성으로 변질됐다.
한국도 이미 그 초입에 서 있다. 경기도 안산 원곡동, 서울 구로·영등포 일대에는 특정 국적 이민자들이 밀집한 거리가 형성됐다. 아직은 이국적 풍경 정도로 소비되지만, 밀도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양상이 달라진다. 주류 사회의 언어와 규범을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자족적 생태계가 완성될 때, 통합은 선택이 아닌 포기가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다음 단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재외 러시아인 보호'였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을 자국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보호를 군사 개입의 구실로 삼았다. 이 논리는 우크라이나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발트 3국의 러시아계 소수민족, 중앙아시아의 중국계 커뮤니티, 동남아의 화교 네트워크. 인접국 혹은 출신국 정부가 자국 이주민을 '해외 동포'로 호명하며 정치적 충성심을 조직화하는 일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한국 내 특정 국적 이주민 집단이 게토화되고, 그 안에서 출신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침투할 여지가 생긴다면? 그것이 선거 개입이든, 여론 조작이든, 혹은 물리적 충돌이든, 그 씨앗은 지금 조용히 뿌려지고 있다. 노동시장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열어둔 문이 안보의 취약점으로 전화(轉化)하는 경로는 생각보다 짧다.
이것은 이민자를 잠재적 적으로 보라는 경고가 아니다. 통합 없는 유입은 결국 모두에게 해롭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이민자가 한국 사회의 언어와 법과 가치를 내면화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만들지 않는 한, 우리는 노동시장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더 큰 균열을 사들이는 셈이다.
미국식 유연성도, 한국식 경직성도 그 자체로 정답이 아니다. 유연성은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만들고, 경직성은 시장을 이중구조로 분열시킨다. 연공서열 폐지, 직무급 전환, 사회적 안전망 확충, 그리고 이민 통합 정책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함께 설계될 때 비로소 채용의 문을 넓히고 사회의 균열을 봉합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두 시스템이 공통적으로 회피해온 질문은 결국 같다. 기술 전환과 경기 사이클의 충격을, 그리고 이제는 인구 구조의 변화까지 — 이 모든 충격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 그 답을 미루는 시간만큼, 균열은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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