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벅 유감(有憾)

나는 가끔 스타벅스에서 혼자 시간을 샀다.

아메리카노 한 잔, 창가 자리, 그리고 귀에 걸친 헤드셋.
랩탑 화면에는 뭔가 그럴듯한 문서가 열려 있었다.

실제로 일이 잘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치고, 나지막한 재즈가 천장에서 내려오고, 유리창 너머로 바쁜 거리가 흘러가는 동안, 나는 그 공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허영이라고 해도 좋다. 나도 안다. 5달러 남짓한 커피 한 잔이 내 지적 수준이나 삶의 깊이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의 그 감각, 굳이 돈을 더 얹어서라도 그 공간 안에서 고르고 싶어지는 그 마음이 반드시 부끄러운 것일까.

인간은 오래전부터 공간에 의미를 입혀왔다. 카페의 불빛 아래서 글을 쓰고, 광장의 분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성당의 높은 천장 아래서 신을 느꼈다.

내가 스타벅스에서 사고 싶었던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 • 그 브랜드가 공들여 조성해놓은 분위기
  • •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는 익명의 여유로움
  • • 노동과 휴식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오후의 감촉

그것은 사소하지만 분명 내 것이었다.

어느 오후, 나만의 사소한 사치를 누리며

그 공간이 달라졌다고 느낀 건 어느 날 갑자기였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이 어떤 진영의 언어 속으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표명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지지하거나 불매하거나.
브랜드는 기호에서 기치(旗幟)가 되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헤드셋을 꽂던 그 조용한 허영은, 어느 진영의 소비 행위로 분류되어 박제되었다.

민망하다는 말이 정확하다.

어떤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좋아하던 물건이 엉뚱한 맥락 속에 놓여버렸을 때의 그 미묘한 거북함. 내가 즐기던 것이 내 동의 없이 어떤 의미의 증거물로 소환된 것 같은 느낌.

작은 사치를 누리는 데도 이제 배경 설명이 필요해진 것 같은 피로감.

브랜드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는 소비되고 소비되면서 변형되는 것이고, 어떤 공간도 영원히 중립일 수는 없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사치가 그저 작은 사치로 머물 수 있었으면 했다.

허영은 허영으로, 연출은 연출로, 오후의 커피는 오후의 커피로.

유감이다.

정치도 문화도 아닌, 그냥 나만의 이야기로 남겨뒀어야 할 그 시간들이, 지금은 어딘가 더 넓은 서사의 각주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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