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한인소기업서비스센터(KASBSC) - 김성수소장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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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골목을 바꾼 한 한국인
— 김성수를 기억하는가
서울대 수석 졸업, 풀브라이트 장학생, 서울대 교수직 —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뉴욕 골목 이민자들 곁에 선 사람
김성수 소장
김성수 (Sung Soo Kim)
한인소기업서비스센터 소장

1990년대 초 뉴욕. 맨해튼 어느 골목 야채가게 앞에서 한 한인 상인이 건물주에게 일방적으로 임대료 인상 통보를 받았다. 항의할 줄도, 어디에 하소연할 줄도 몰랐다. 영어도 짧고, 미국 법도 몰랐다.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한 남자가 있었다.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유학을 마치고 모교 교수직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뉴욕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평생을 뉴욕 골목 소상인들을 위해 싸웠다. 그의 이름은 김성수(Sung Soo Kim).

한인들이 뉴욕 골목을 바꾸다
뉴욕 골목 상권 변화 도표
1980년대 유대인에서 한인으로 — 뉴욕 골목 상권의 10년간 변화

1980년대 초 뉴욕 시내 구멍가게는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인 이민자들이 물밀 듯 뉴욕으로 몰려오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한인들은 유대인 가게보다 일찍 문을 열었다. 아예 24시간 문을 열어버렸다. 밤새 일했다. 가족이 교대로 가게를 지켰다.

한국에서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였던 이민자들은 영어 실력의 한계로 자신의 경력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 대신 소자본과 가족 노동력으로 운영할 수 있는 소규모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유대인 가게 주인들은 하나둘 한인들에게 가게를 헐값에 넘기고 골목 상권을 떠났다. 야채·과일·그로서리 1,700개, 세탁소 1,000여 개, 네일가게 2,000여 개 — 뉴욕 시내 골목 소상권의 상당 부분이 한인들의 손으로 넘어왔다.

1,700
한인 운영
야채·과일·그로서리
600+
한인 운영
생선가게
1,000+
한인 운영
세탁소
2,000+
한인 운영
네일가게
22개
소상인 연합
참여 단체

다만 델리가게는 샌드위치를 만들 줄 몰라 한인들이 잘 덤비질 않았다. 그래서 보데가와 한인 야채·과일가게가 공존하는 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다.

정치력 빵점인 이민자들의 대변인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건물주는 일방적으로 임대료를 올렸다. 도매상은 한인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강요했다. 영어도 짧고, 미국 법도 모르고, 정치 인맥도 없는 이민자들은 그냥 당하고만 있었다.

김성수가 나섰다. 그는 뉴욕시에서 가장 오래된 소기업 서비스센터인 한인소기업서비스센터(KASBSC)를 설립했다. 뉴욕시 소기업 의회와 뉴욕시 소기업 구하기 연합도 공동 창립했으며, 딘킨스 시장과 줄리아니 시장 두 사람 모두에게 시장 소기업 자문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뉴욕시 정부는 소상인들을 '현금 젖소(cash cows)'로만 본다. 그들에게는 소속감과 자부심, 뉴요커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 김성수

그는 시의회를 움직였다. 가게 앞 인도에 물건을 내놓고 팔 수 있게 하는 매대 조례, 렌트안정법이 모두 그의 끈질긴 로비의 결과였다. 지금 뉴욕 골목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과일 가판대 풍경, 그것이 김성수의 작품이다.

월마트와의 전쟁 — 1995년의 결전
월마트 메가스토어 반대법 통과 도표
1995년 메가스토어 반대법 통과 — 지금도 뉴욕시 안에 월마트 매장이 단 한 곳도 없는 이유

1990년대 중반, 월마트, 샘스클럽, 코스트코 같은 대형 양판점들이 뉴욕시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만일 이들이 뉴욕 한복판에 들어온다면 골목 소상인들은 줄줄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김성수는 한인 상인들을 규합해 소상인 연합을 결성했다. 22개 단체와 함께 시의회를 압박했다. 당시 참여한 소상인만 해도 1만 명에 달했다. 그 결과 뉴욕시의회는 메가스토어 입점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덕분에 지금도 뉴욕 시내에는 월마트 매장이 단 한 곳도 없다. 보데가와 한인 가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지금 뉴욕 골목을 걸으며 과일 가판대와 구멍가게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 당연함 뒤에 1995년의 싸움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언론은 그를 "뉴욕 소기업계의 대부(Godfather of New York's small business community)"라고 불렀다. 1995년 타임지가 선정한 '뉴욕을 움직이는 25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딘킨스, 줄리아니 두 시장이 모두 그를 필요로 했다.

그가 남긴 것

김성수 소장은 몇 년 전 타계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들이 있다. 뉴욕 골목 곳곳의 보데가, 한인 야채가게, 세탁소. 그리고 지금도 인도 위 매대에 과일을 쌓아놓고 파는 수천 명의 소상인들.

서울대 수석 졸업, 풀브라이트 장학생, 컬럼비아대 대학원, 교수직. 그 화려한 스펙을 모두 내려놓고 뉴욕 골목 이민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뉴요커가 얼마나 될까.

지금 한인 2세들은 엄마, 아빠들이 뼈저리게 고생하며 구멍가게를 일구고 밤잠 설쳐가며 가게를 지킨 덕분에 열심히 공부하고, 한국인 특유의 충효사상을 물려받아 말 잘 듣는 자녀로 성장했다. 그 결과 좋은 직장에 취직도 수월하게 했을 뿐더러 머리도 우수해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구멍가게를 일군 1세대들은 이제 야채 상자는 고사하고 물병 하나 들 힘도 없는 노인들이 되어 은퇴를 했다. 당연히 잘 나가는 자녀들이 그 험한 가게일을 할 리도 없다. 그래서 소기업센터도 문을 닫아야만 했고, 소장님의 피나는 노력을 추모할 이도 하나 남지 않은 전설로, 별이 됐다.

하지만 지금의 코리안 아메리칸의 위상은 소장님의 힘에 의해서 발아된 것이 확실하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 아니, 나는 — 죽어도 그 분을 기억하고 추모할 것이다.

이 글은 공개된 자료와 현장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City Journal · Gotham Gazette · Queens College Asian America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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