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또 너였어?

시사 / 심리 칼럼

특권과 모욕 사이 — 왜 그들은 피해자를 공격하는가

작성일: 2026. 05. 23

5·18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5·18을 심판합니다. 세월호 앞에서 울지 않은 사람들이 유가족의 슬픔을 조롱합니다. 그것도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이, 가장 낮은 언어로 말이죠.

이 현상을 단순히 몰상식이나 인성 문제로 돌리면 너무 쉽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매우 구조적인 심리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1. 고통을 인정하면 자신의 서사가 무너진다

의사, 변호사 같은 고지위 직군은 대부분 '노력한 자가 성공한다'는 능력주의 서사에 자신의 정체성을 걸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암기능력이 됐든 수리판단력이 됐든, 그들은 경쟁사회 초입에서부터 남다른 능력으로 성공가도를 내달린 자들입니다. 단, 개중에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로 배출된 '소수자'들이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을 못나게 배설하는 공간이 곧 일베입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즐깁니다. 반말과 욕짓거리가 난무하는 난리통 속에서 저들은 서푼짜리 지식을 자랑하고 저들만 아는 용어와 이론을 교묘하게 엮어 상대방의 입을 봉쇄하는 말초적 쾌감에 몸과 정신을 내맡깁니다. 그렇게라도 그들은 스스로 위대해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5·18 피해자나 세월호 유가족의 존재는 그 확고한 그들의 서사에 균열을 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국가와 사회가 평범한 인간을 순식간에 짓밟을 수 있다는 엄혹한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공격은 가해 충동이 아니라, 자기 세계관을 지키려는 방어 기제에 가깝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피해자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서사를 만들어내면, 세계는 다시 '능력과 노력으로 설명 가능한 안전한 곳'이 되니까요.

2. 도덕적 면허 효과: 낮에는 흰 가운, 밤에는 익명의 혐오

사회는 고지위 직군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요구 자체가 역설적으로 문제를 만듭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면허(Moral Licensing)' 효과 때문입니다.

평소에 충분히 도덕적이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특정 공간에서는 반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내적 허가를 스스로에게 쉽게 내립니다. "나는 평소에 사회를 위해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여기서만큼은 이래도 돼"라는 기괴한 논리입니다.

  • 낮의 세계: 흰 가운을 입고 생명을 다루는 엘리트
  • 밤의 세계: 익명 뒤에 숨어 광주 시민을 폭도라 부르는 이면

이 두 세계의 낙차가 클수록 그들이 느끼는 왜곡된 쾌감도 커집니다.

3. '놀이'에 가담한 자본, 혐오를 정상화하는 신호

이 '도덕적 면허'가 익명의 개인을 넘어, 공적 책임을 지닌 대기업 오너에게서도 드러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용진 신세계 회장의 SNS 스타벅스 굿즈 소동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엄밀히 말해 똑같은 혐오스러운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해왔던 인물입니다. 5.18을 폄훼하고 고문에 의해 죽어간 민주영령을 욕보이는 자극적 문구를 내걸고 돈벌이에 나선 것이 이미 여러 차례였기 때문입니다. 한 해 수천 억씩 버는 그가 정말 돈에 눈이 멀어 벌인 촌극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의 일베스러운 이런 행위에는 분명히 그의 정치적 신념을 드러내기 위해 장삿속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씌웠을 뿐일 것입니다.

그는 당시 일베(일간베스트) 밈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문법을 차용해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수조 원대 기업을 이끌고 대중을 상대하는 유통 재벌이 혐오 서브컬처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소비한 것입니다.

'몰랐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이유: 일베 밈은 그 맥락과 역사적 비하의 의미를 모르면 결코 구사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 '파급력': 일반인의 일베 놀이는 익명 공간에 머물지만, 재벌 오너의 SNS는 수십만 팔로워에게 "이 정도는 괜찮다", "이런 감수성을 가져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냅니다.

혐오를 사회적으로 정상화하는 데는 익명의 군중 수만 명보다, 영향력 있는 유명인 한 명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사회학의 오랜 명제입니다.

4. 피해자는 왜 특별히 표적이 되는가?

단순한 무차별적 혐오라면, 굳이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골라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5·18 생존자와 세월호 유가족이 끊임없이 표적이 되는 데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이 있습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국가와 기득권을 향한 질문'을 살아 숨 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역사의 기록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기득권 구조 안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송곳처럼 불편합니다. 피해자가 침묵하면 질문도 사라집니다. 결국 피해자를 향한 공격은 단순한 배설이 아니라, 불편한 역사적 부채감과 질문을 원천 봉쇄하려는 조직적인 정치 행위입니다.

5. 결국,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북한군 개입설, 호남 폭동론 같은 일베식 역사 왜곡이 반복되는 것은 그것이 진짜 '재미있어서'가 아닙니다. 철저히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국가 폭력의 역사를 지우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꾸며, 진실을 밝히려는 기억 투쟁 자체를 피로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으니까요.

결국 고지위 직군의 피해자 공격, 재벌 오너의 혐오 놀이 가담은 하나의 공통된 공포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이 속한 기득권 세계의 정당성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광주의 진실과 세월호의 슬픔이 온전히 인정되는 사회는, 국가가 틀릴 수 있고 기득권이 공범이 될 수 있음을 공식화하는 사회입니다. 그 사회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 나'의 지위도, '대를 이어 재벌이 된 나'의 권력도 더 이상 도덕적 면죄부가 되지 못합니다.

💡 글을 맺으며: 뻔뻔함은 묵인 위에서 자란다

재벌과 엘리트의 공적 책임은 단순한 도덕 선언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리는 시장 지배력, 세제 혜택, 사회적 인프라는 결국 우리 공동체가 제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급부로 요구되는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조롱하는 문화에 편승하지 않는 것. 이것은 높은 윤리 기준이 아니라, 공적 지위를 가진 자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값'입니다.

오늘도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이 현장을 증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가장 멀리 있던 자가 가장 큰 목소리로 역사를 재단합니다. 이런 오만과 소동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어가는 사회는, 그 다음 단계의 모욕에 더 무뎌질 뿐입니다. 뻔뻔함은 언제나 우리의 묵인 위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묵인이 반복되다가 급기야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노리개가 돼야만 했던 어린 소녀들에게 돈벌이 나섰던 매춘부라고 동네방네 왜장을 치고 다녔던 김병헌 같은 작자도 나타나는 거지요. 이 질기고도 징그러운 반복을 언젠가 한 번은 처절할 정도로 단호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이번이야말로 바로 그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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