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隔世之感)의 K-푸드 열풍 속에서 생각하는 문화의 유연함
♤ 1980년대 중반, 낯선 뉴욕 땅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마주했던 한인 사회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당시 뉴욕 일원의 동양식품점이나 한국식품점 한구석에는 가게 주인의 투박한 손맛으로 버무려진 김치와 밑반찬들이 일회용 플라스틱 컨테이너에 담겨 소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고향의 맛이 사무치게 그리운 이민자들이나 조심스레 찾아와 사 가던 그 가내수공업 형태의 음식들이, 이제는 당당히 ‘K-문화’라는 세련된 외피를 입고 맨해튼 한복판에서 외국인들에게 고급 문화 상품으로 대접받으며 대량으로 소비되고 있다.
40여 년 세월 동안 뉴욕을 지키며 그 변화의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온 나로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 늘 일상식으로 한국 음식을 접해온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요즘 외국인들이 보여주는 한국 문화에 대한 열광은 때로 어리둥절할 만큼 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음식을 저렇게까지 줄을 서서 열광하며 먹을 일인가?" 싶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선을 인류의 거대한 역사로 넓혀보면, 인류 최초의 발자취이자 거대한 유산으로 떠받들어지는 황하, 메소포타미아 등 ‘4대 문명’조차도 알고 보면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던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과 삶의 흔적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쓰는 K-푸드 열풍 역시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뉴욕 구석진 식품점의 작은 반찬통에서 시작된 우리네 평범한 일상의 발자취가 세계인의 보편적인 입맛과 닿아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흐름인 셈이다.
♡ 여기서 우리가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요지는 분명하다.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문화의 흐름이나 대세라는 것도, 역사라는 긴 호흡에서 바라보면 결국 '한때의 유행'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영원할 것 같던 거대 문명도 시간이 흐르면 쇠퇴하고 새로운 문화에 자리를 내주듯,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국 음식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 어린 관심 역시 언제까지나 영원히 머물러 있어 주지는 않는다.
문화의 파고는 언제나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과분한 인기에 도취되어 쓸데없이 우쭐거리거나 국수주의적인 자만심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이 유행의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도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는 장기적인 지혜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 그 지혜의 해답은 바로 우리 문화가 본래 가지고 있던 최고의 자산인 ‘유연함’에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의 선조들은 결코 우리 것만을 절대적으로 고집하며 성벽을 높이 쌓고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대륙과 해양의 교차로에서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되, 특유의 포용력과 유연함을 발휘하여 우리만의 색깔로 조화롭게 녹여내는 뛰어난 혜안이 있었다.
뉴욕이라는 거대한 멜팅팟(Melting Pot) 안에서 한국 음식을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더 깊숙이 이식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 선조들의 유연성을 오늘날의 감각으로 다시금 발휘해야 한다.
☆ 우리의 전통 조리법이나 고유의 맛만을 정답이라 고집하며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한국 음식의 본질적인 매력은 잃지 않으면서도 현지 외국인들의 기호와 식문화를 유연하게 수용하고 녹여내야 한다.
그들이 낯선 이국 음식을 호기심에 '한 번 먹어보는 이색 이벤트'를 넘어, 매일의 식탁 위에서 자연스럽게 찾는 '지속 가능한 일상'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것.
우리 것의 경계를 허물고 그들의 기호를 영리하게 이식하는 유연함이야말로, 지금의 격세지감 속에서 우리가 발휘해야 할 진정한 문화적 지혜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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